역사

[스크랩] ♦ 한양은 조선 500년 도읍지가 아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12. 24. 22:15
 

“조선의 한양(서울)”은 일제가 급조했다.

◉ 한양(漢陽), 한성(漢城), 서울의 유래(由來).


1, BC 5년 백제의 수도이다.

13년(기원전 6년)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돌아가니 61세이었다.

5월 온조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국]의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안한 날이 없다. 그런데 이제 국모(왕의 어머니 소서노)까지 돌아가시니 나쁜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도읍을 옮겨야 하겠기에 내가 어제 한강(漢江) 남쪽을 두루 살펴보고 기름진 땅을 알았다.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오래 동안 편히 살길을 찾아야 겠다." 라고 말하였다. 7월에 한산(지금의 광주)에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백제의 온조는 열 신하와 함께 漢山(한산)의 負兒嶽(부아악)에 등정하여 바라보니 북쪽은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은 큰 높은 산이 있고,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입니다. 온조왕 재위 14년(기원전 5년)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기었다.


2, 신라 9주의 漢州(한주)이었다.

신라의 9주는 신문왕 5년(685년)이 설치했다. 한주(漢州)는 고구려의 한산군으로 신라가 빼앗아 경덕왕(742-764년)이 한주로 개명했다. 9주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는 신라 및 伽倻(가야)의 地(지)이고, 漢,朔,溟(한,삭,명)의 3주는 옛 고구려의 남부이고, 熊,全,武(웅,전,무)의 3주는 백제 故地(고지)에 설치한 것이다.


3. 한성(漢城)은 고려의 남경이다.

1),후 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918~943)는 開京(개경:동경:하남성)을 중심으로, 西京(서경:감숙성 서안), 南京(남경:강소성 양주,한양)의 三京(3경)을 설치하고 각 경에 일년에 4개월씩 상주하는 3경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2),『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920년) 9월조에 2년 8개월에 걸친 대역사 끝에 9년(926년) 5월 楊州(양주)에 南京(남경)을 완공하였다.


3), 고려 제15대 숙종왕(1095∼1105)은 양주(楊州:강소성) 남경(南京:한양)에 천도하기 위해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직접 조영(造營)했다.

 

김위제(金謂旣)가 『도선기(道詵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숙종에게 상서하여 남경천도를 건의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사 김위제 열전]에 의하면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 등의 내용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즉 고려 태조는 開京(개경), 西京(서경:섬서성), 南京(남경:강소성)의 3京(경)제도를 실행하고 각 경에 4개월씩 상주하고 있으면 해외의 36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태조가 고려를 개국한 후 160여 년에는 목멱양(木覓讓)의 양주 남경으로 도읍하리라, 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지금이 바로 남경 양주로 순주할 때라고 주장했다.

<목멱산(木覓山)은 대륙 장앙 남쪽 종남산,화산,남산(南山)에서 유래(由來)했다.>


4), 고려 숙종 6년(1101)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문상(文象) 음덕전(陰德全)과 함께 양주(강소성)로 가서 도읍에 마땅한 지역을 살피게 하였다.


5), 1357년 정월 공민왕은 奉恩寺(봉은사)에 가서 태조 進殿(진전)에 참배하고 漢陽(한양)으로 遷都(천도)하는 일로 점을 쳤더니 왕의 손에 靜(정)자가 잡혔다.

 

6), 1359년(공민왕 8) 12월 홍건적의 장군 모거경(毛居敬) 등은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여 고려의,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철주(鐵州)가 함락되고 마침내 서경(西京:섬서성 서안(평양)도 함락되었다.


7), 1360년 1월 공민왕은 太廟(태묘:태조종묘)에 가서 (5관군의 遂安(수안)과 谷州(곡주:양자강 상류 宜昌(의창)으로 수도를 옮길 遷都(천도)에 대해 점을 쳤더니 불길한 점꽤가 나왔다. 그때 漢陽(한양)에서 궁궐을 건축하던 사람들이 많이 얼어죽었다.


             ◈ 공양왕은 檜巖寺(회암사)에 갔다

8), 공양왕은 드디어 1390년 9월 병오일 수도를 한양(漢陽:양주,남경)으로 옮겼다. 공양왕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하남성 개원,동경)을 지키게 하고 수도를 漢陽(한양:강소성 금주,양주)으로 천도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개경:하남성)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공양왕은 수도 한양(漢陽:강소성 양주)을 떠나 개경(동경 하남성)에 머물러 있다가 檜巖寺(회암사:하남성 석성현에 지금도 있다.)에서 승려 1천여 명을 불러 놓고 불사를 크게 베풀었는데 악관을 동원하여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며 왕이 직접 향로를 들고 동서 승당을 돌며 불사를 베풀고 왕비와 함께 음식을 직접 권하였다. 당시 유교를 받들던 조정대신들의 불만은 매우 컸다. 상기의 본문은 결정적 단서입니다.


4. 한양(漢陽)은 조선 500년 도읍지이다

1394년(태조 3) 새 왕조의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서울을 개성(하남성 개원)에서 다시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896년 조선 고종 재위 34년에 국호를 大韓帝國(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光武(광무)로 하였다. 즉 지금의 한양은 상기의 문헌상(1~4) 무려 2천년의 도읍지입니다. 그리고 한양은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로 인식하고, 한국인의 일반적 상식입니다.


♦ 한양은 조선 500년 도읍지가 아니다

문헌상 상기와 같이 지금의 한양(서울)은 BC 5년 백제의 수도로 정하고부터 2006년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무려 2,000년의 중요 도읍지이다. 과연 지금의 서울(한양)은 이성계의 도읍지가 맞는가? 일제가 급조했는가? 살펴보자!


대륙의 한양이 한반도 속으로 심어졌다

 

한양(漢陽)은 한(漢=BC,206-AD24년)때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경부현(慶符縣) 남쪽을 한양(漢陽)이라했다. 또한 후한(後漢=25-219년)시대 전(前) 한수군(漢水郡=지금 감숙성 감곡현 남쪽)을 한양(漢陽)으로 고쳤다.

촉(蜀=221-263년)때에 지금의 사천성 경부현 남쪽을 한양(漢陽)이라 했고,  송(宋=420-479년)때 지금의 사천성 현죽현(縣竹縣)을 한양(漢陽)이라 했다.

 

또한 남조 제(齊=478-502년)때 지금의 사천성 경계에 한양(漢陽)을 두었다, 원(元=1206-1368년)시대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을 두었으며, 지금은 호북성에 큰 도시로써 한양현청(漢陽縣廳)이 있고 무한(武漢) 3진(三鎭)을 이루어 군사공업(軍事工業)의 요지(要地)이다. 또 이를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 경북궁은 흥선대원군이 창건하였다.

한반도 속의 한양(漢陽) 경북궁은 흥선대원군이 창건하였다. 대원군은 재정 조달의 어려움 등 온갖 무리를 무릅쓰고 이씨 조선의 중흥대업(中興大業)을 위해 경북궁을 창건해냈다. 경북궁의 공사는 1865년 시작해 1867년 완공되었다.

 

중국 대륙의 한양(漢陽)을

일제는 한반도 속으로 옮겨 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제가 만든 망국적 국사 반드시 철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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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계일종교리촉진회(世界一宗敎理促進會)
글쓴이 : 한얼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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