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칠지도(七支刀) 1

거자필반(去者必返) 2007. 3. 10. 20:36

 

칠지도(七支刀)의 모습

 

칠지도(七支刀) 1
 
백제 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제 칼.

일본 나라 현[奈良縣] 텐리 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니혼쇼키(日本書記)> 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칠지도의 명문은 이소노가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이용되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는 369년(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에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했다"라는 것과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백제의 우위를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는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표현한 데 반하여 상대방인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 양식으로 되어 있어 이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의 하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할 때,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 동기는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일종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양국간의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백제왕이 그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다. 한편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왕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즉 초월적인 권위 및 사방천하관(四方天下觀)이 반영되어 있으며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부여 군수리 절터의 탑기둥 구멍 밑에서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현재 일본의 국보로 되어 있는 이소노가미신궁의 백제의 칠지도는 ,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로서 유명하다. 이 칠지도는 역사상 백제만이 가진 주술적인 무기이다. 이 칼은 일본 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백제왕이 왜국왕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백제왕이 그 번국의 왜왕 지(旨)에게 하사한 것이다. 칠지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월 16일 병오, 백련검 칠지도를 만들었다. 마땅히 각 후.왕.군과 장군에게 공급 하여야 할 것이다. ....선세이래로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국에 경사가 있었으므로 왜왕 旨 를 위하여 이를 만들었다. 후세에 영원토록 이를 전하라 " 조공이란 일종의 무역인데 큰 나라에서는 큰집 형님이 동생들에게 선물을 하듯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다. 바친자니까 약자가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칠지도(七支刀)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일본이 4C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 하였던 바 이러한 상황이 6C 중엽까지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국 한반도 남부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 되므로 일명 남선 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한다. 이 주장은 현제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고 한편으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고 있다.


일본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는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즉 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일본서기(日本書紀)]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說)라는 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백제가 왜(야마토)에게 바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가 정말로 임나(가야)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지배를 하였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위해 한/일합방 이후 김해(가야의 옛땅)지방의 고분들을 조사하였으나 유물,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일본에 의하여 지배당하였다는 그 문화 유물에 반영된 바가 없으므로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임나일본부설 에서의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의 관련 기술이 한정된 6세기 당시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이지 않았다는 등의 수많은 모순은 일본내에서도 일찌감치 지적돼왔다.
마지막으로 고대국가의 강력함은 철제사용에서 비롯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철의 생산이 5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가야,백제에서 공급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야는 4세기부터 철을 사용(무려 100년의 차이)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본이 가야를 상대로 싸울 수가 있었을까? 일본은 지금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신공황후가 한반도로 건너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 했으며 그 중심 기관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sunrisesunset
글쓴이 : 無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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