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조선시대의 천인

거자필반(去者必返) 2005. 11. 8. 20:50

광  대

 

광대란 고려시대까지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을 말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탈놀이,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판소리하는 사람들도 광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공연하는 내용과 구성원에 따라 정주하거나 유랑하는 두 집단을 이루었는데 유랑집단이 더 많았다. 각 지방 관청에는 재인청(才人廳)을 두어 광대를 국가 행사에 동원시켰다. 중국의 사신을 위한 영접행사나 고을 수령의 행차에서 노래와 재주를 부렸다. 또한 관아와 양반층의 행사가 있을 때도 불려 갔다. 따라서 조선초기까지는 관에 소속된 광대의 수가 많았음을 짐잡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광대들이 직업적으로 쉽게 형성된 배경은 ①임진왜란과 두차례의 호란으로 인한 궁중의 악공과 악생들의 분산, ②한양의 산대도감 폐지에 따른 예인(藝人)들의 유랑화, ③폐농으로 인한 농민들의 참여, ④각 고을 재인청에 소속된 자들의 중과세로 인한 도피 등이 있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이들이 쉽게 동류화 될 수 있게 하였다. 광대들은 주로 상업이 발달된 곳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궁중의 행사, 마을의 행사, 환갑과 혼인 등에도 불려 다니며 전문적인 예인 집단으로 발전하였다.

예인 집단에는 사당패, 광대패, 남사당패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사당패는 여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주된 공연 종목은 판염불을 중심으로한 춤과 노래였다. 사당패에는 사당과 짝을 이루는 거사들이 있다. 거사는 악기연주, 사당패의 뒷바라지, 사당의 허우채〔解衣債:몸값〕등을 관리하였다. 광대패는 재인청 출신의 무부(巫夫)들이 떠돌이로 전환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뛰어난 예술적 기능을 지녔고 공연 내용도 풍부하고 종합적으로 진행되었다. 광대들의 재주는 가곡, 판소리, 곡예, 가면춤, 검무, 꼭두각시놀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소리광대인 가곡과 판소리를 하는 사람의 대우가 가장 좋았다. 판소리 광대는 대부분 하층계급에서 나왔고 무당의 남편 중에도 훌륭한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다.

남사당패는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는데 35~50명의 구성원이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 등 주로 6종류의 놀이를 연출하였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상명하달식의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구성원의 선발은 자진해서 오는 경우도 있으나 유혹 또는 납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철저한 남색조직으로 타인에게 몸을 팔기도 했는데, 연행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사당의 유명한 무동춤은 여장을 한 남자아이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예인집단과 달리 마을 대표의 허가가 없으면 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허가를 얻으면 길놀이를 하며 마을을 몇 바퀴 돌고는 밤에 횃불을 밝히고 남사당 놀이를 진행하였다.

광대와 같은 유랑 집단은 사회적, 자연적 환경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1년의 대부분을 유랑하였으므로 의식주의 해결이 매우 불안정하였다. 특히 떠돌아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다만 겨울은 광대의 휴식 시간으로 기술연마을 할 수 있는 정주기간이었다. 그러나 연행을 할 수 없으므로 한 해 동안 벌어 놓은 것이 없으면 각자 생계를 위하여 집단이 흩어지는 때이기도 하였다.

 

 

백  정

 

조선시대의 백정은 대개 북방의 유목민족 출신으로 조선초기에 유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선사회에 정착하면서 수렵, 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의 도살법을 이용하여 가축의 도살과 육류 판매업을 하였다. 이외에 버들고리를 이용한 바구니 제조와 가죽신을 만들거나 농경에도 종사했으나 도살을 겸하는 수준이었다.

백정은 소와 말의 도살과 판매를 독점적으로 하였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평민 중에서 생활이 어려운 자들은 백정으로 업종을 바꾸기도 하였다. 개, 돼지, 양은 일반 백성이 잡을 수 있었지만 보통 백정에게 맡기는 형편이었다. 이때 작업 도중 발생하는 가죽, 내장, 뼈 등을 보수로 받았다.

백정은 거주 이전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다. 조선초부터 정부에서는 이들을 평민과 강제로 결혼시켜 유목민적 기질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평민들은 천한 백정과의 결혼을 회피하였고, 백정들은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도살업과 육류 판매를 겸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마을에는 백정이 아니면 들어가 살 수 없었고, 백정이 그곳을 벗어나 살수도 없는 특수부락이었다.

조선사회에서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므로 조세와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노비도 기재되는 호적은 물론 호패도 쉽게 발급해주지 않는 차별정책을 펴서 사회적인 고립과 멸시를 받게 하였다. 백정의 집은 기와를 올릴 수 없었고 비단옷과 두루마기를 입지 못하였다. 그리고 관혼상제에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유교적 예법을 행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초상을 당해도 상복은커녕 상여도 쓸 수 없었고, 결혼식에는 말이나 가마 대신 소와 널판지를 이용하였다. 또한 남자들은 상투를 묶지 못했고 여자들은 비녀를 찌르지 못했다. 그밖에 일반인 앞에서 음주와 흡연은 물론 대중모임에 쉽게 참석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연령에 관계없이 백정에 대해서는 반말을 했으며,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집단 구타를 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백정은 사회의 제일 밑바닥 신분으로 평민의 아이들도 그들의 상전이었다.

조선 사회의 백정에 대한 차별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혁파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도 지속되었다. 결국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의 학교 통학문제가 확산되어 발생한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을 계기로 겨우 완화되게 된다.


 
출처 : 한별 |글쓴이 : 권영선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