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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란 참전 조선장수

거자필반(去者必返) 2005. 11. 15. 21:26
왜란 참전 조선장수 | 임진왜란과 의병사 2005/06/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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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카르마의 세상
곽재우 (郭再祐 1552 ~ 1617, 본관 현풍)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때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수없이 일본군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일본군을 피하여 달아났던 관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석방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1592년 6월 말 안고구지 에게이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정암진에서 싸워 이겼다.
그 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질 뿐만아니라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체포되었고, 또 절친한 광주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억울학게 옥사한 것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7년 7월 말 창녕 화왕산성을 곽재우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 우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공격하려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다 공격을 포기하고 초계, 합천을 지나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찰리사와 절도사를 지냈고, 광해군때는 영남 절도사와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러나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뒤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 황해도 관찰사 월의 아들, 조식의 외손서.



권율(權慄 1537 ~ 1599)

권율은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광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천 여명의 의병을 모집여 금산군과 완주군의 경계인 이치에서 고바야가와 다가가게가 지휘하나는 일본군 제 6군 15,000명을 격퇴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을 단념하게 하였다.

또 북진하여 수원의 독왕산성에 주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 제8군 우기다 이헤이에가 지휘한 1만명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일본군은 평양에서 패전하여 퇴각한 고니시 유기나가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고니시 부대를 선두로 마스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오오다니 요시쓰구, 구로다 나가마사, 우기다 히데이에, 깃가와 히로이에의 순으로 곧 지금까지 전공이 없었던 부대를 차례로 하여 1593년 2월 12일 미명에 3만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2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총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쓰나리, 깃가와 히로이에 등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와 공격을 단념하였다.

이 행주대첩의 전공으로 권율은 도원수에 올랐다. 그러나 도망병을 즉결처분하였다는 모함으로 해직되었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대전하였으나 명나라 총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명령으로 철수했으며, 이어 순천 왜성에 있는 고니시 유기나가가 이끈 일본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린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 간첩의 말에 속아 한산도에 잇는 이순신 장군에게 잘못된 왕명을 전달하고, 이순신장군을 면직시키는데 협조한 행동은 큰 과오라 할 것이다.



김덕령 (金德齡 1567 ~ 1596, 본관 광산)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와 담양에서의 의병을 일으켰다.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협력,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594년 9월 29일과 10월 4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과 곽재우 장군 그리고 김덕령이 같이 협력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도다 가쓰다가가 수비하고 있는 잠문포 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이 성밖으로 나오지 않아 싸우지 못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을 장살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1596년 7월 충청도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러 가다가 이미 집압되어서 회군하였다. 이때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 신경행이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무고를 하여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1596년 8월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영조때 억울함이 밝혀져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되었다.

시호는 충장, 붕섭의 아들, 의병장 덕홍의 아우, 별제 덕보의 형



곽준 (郭逡 1550 ~ 1597, 본관 현풍)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안읍현감으로 있을 때 황석산성을 지키다 왜군의 공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곽이상, 곽이후 형제는 아버지가 임금을 위해 죽었으니 아버지를 위해 죽는다면서 뒤따라 전사했다. 이어 딸과 며느리 신씨도 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는데 어찌 생명을 지키겠는가라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에 세상에서는 한 집안에서 삼강의 모범이 모두 나왔다고 해서 '일문삼강'집안이라고 불렀다. 뒤에 병조 참의에 추종되었다.



권응수 (權應銖 1546 ~ 1608, 본관 영천)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홍 휘하에 있었는데, 박홍이 도망하여 부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정대임과 함께 일본군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점령하고 있는 영천성을 화공법을 써서 1592년 7월 26일 탈환하였다. 다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 다가와 나이기가 점령하고 있는 경주성을 경상좌병사 박진과 함께 공격하여 8월 20일에 탈환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로가 위험하게 되었다.



김면 (金沔 1541 ~ 1593, 본관 고령)

남명 조식 이황에게 학문을 배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무계, 우지현, 지례, 진주, 영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신 경상우도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대립(김수와 곽재우) 의병 사이의 대립(김면과 정인홍) 관군 사이의 대립(김성일과 김수)이 있어 일본군과 싸우는데 지장이 많았는데, 김면은 김성일과 함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593년 3월 10일 진중에서 갑자기 병사하였다.



김응서 (金應瑞)

김응서는 용강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29세의 나이로 종군하여 평양서쪽을 방위하였다. 평안도방위사가 된후 다시 경상부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유재란 때 이중간첩 요시라의 거짓말에 속아 조선 조정에 헛정보를 전했다. 조정이 이순신을 체포하여 원균을 패사케 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는데 관계가 있다하여 백의종군하였다. 광해군 11년(1618) 도원수 강홍립을 딸 부원수로서 만주에 출병하여 누루하치에게 항복한 후 정보를 전달하다 탄로나 살해되었다.



김시민 (金時敏 1544 ~ 1592, 본관 안동)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킨 장군이다.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판관을 거쳐 진주통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을 잘 수리하고 군비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했다. 사천, 고성, 진해 등지의 싸움에서 적을 무찌르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진주성 싸움이 벌어졌다. 1592년 10월 6일 가토 미써야스, 나가오다 다다오기, 하세가와 히데가스, 기무라 시끼지 등이 지휘한 2만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왔는데, 곽재우, 정기룡 장군의 지원을 받은 3,800명의 조선군이 5일간의 치열한 공방정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치열한 싸움 뒤 성을 순시하다가 시체속에 숨어 있던 왜병의 총에 맞아 순국하자 성안의 모든 백성이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 봉호는 상락부원군, 지평 언묵의 손자, 북평사 충갑의 아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왜군과 싸우다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순국하여 영의정에 추증된 제갑의 조카, 이조참의 치의 아버지, 참판 득신의 조부



고경명 (高敬命 1533 ~ 1592, 본관 제주)

고경명은 당파싸움으로 서인이 제거될 때 동래부시직에서 사직하고 낙향,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노구로 광주에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에 침공하려는 고바야가와 다다가게가 지휘하는 제 6군 12,000명과 금산에서 싸워 1592년 7월 9일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같이 싸워 전사하였고, 맏아들 종후 또한 군사를 일으켜 복수장으로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딸도 정유재란 때 남편을따라 순절하였고, 동생 경신, 경형 등 일가족 9명이 전사하였다.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 호조참의 신득의 6세손, 대사헌 맹영의 아들, 현령 종후, 학유, 인후, 판결사 용후의 아버지



김천일(金千鎰 1537 ~ 1593, 본관 언양)

산림에 묻혀 사는 어진 선비를 뽑아 쓰는 유일로 벼슬길에 올라 순창군수 최경회, 박광옥 등과 의병을 모아 여러 싸움터에 나가다 선조는 그를 장의로 삼았다.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북향 4배한 후 최경회, 황진, 양산숙등과 함께 남강에 봄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때 아들 김상건도 함께 목숨을 버렸으며, 이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뒤에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했다.

호는 건재, 시호는 충장, 예의판서 용휘의 후손, 목사 순경의 현손, 진사 언침의 아들





김충선 (金忠善 1571 ~ 1642, 본관 사성김해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나의 21살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했다. 선조25년 4월 13일이었다. 상륙한 지 일주일 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에게 은밀하게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고 내 군대가 약하지도 않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다. 그래서 귀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해 장수가 된 그는 부산, 경주, 영천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군을 무찔렀다. 또 우리군대에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18개의 성을 되찾는 공을 세웠다. 그의 무공과 충절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불러 김해 김씨라는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른 살 때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선조 36년 여진족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겼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자신이 10년 간 지켰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창의했다. 그때 나이 66세, 의병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조정에서 항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증추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호는 모화당, 상호군 경원, 부호군 계인의 아버지, 선전관 진명의 조부



김여물

조선시대의 충신. 자(字)는 사수(士秀), 호(號)는 피구자(披 子),외암(畏菴), 본관은 순천(順天),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 )의 부친이다. 현 안산시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神道碑)에는,「무릇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 그의 대인(大人)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 있는데, 이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한 것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兵書)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호조(戶曹)·예조(禮曺)·병조(兵曹) 등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忠州郡事)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1)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6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案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변응정 (邊應井)

변응정은 원주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무관으로 해남현감이었다. 해전에서 전공을 세워 전라수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597년 7월 8일 웅치전투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도망하였다. 그 전투에서 전사한 정담과의 "같이 살고 같이 죽자"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괴로워 하여 1597년 8월 제 2차 금산전투에서 싸우다가 38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백사림 (白士林)

백사림은 무관으로서 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군이 공격하여 왔으나 성곽이 견고하고 산세가 험해 방비하기는 유리하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이전에도 안의현감 곽준이 잘 싸워 일본군의 공격이 여러번 실패한 바 있어 전사에 남을 대승리가 확실한 전투였다. 그러나 1597년 8월 16일 밤 백사림은 자기가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동북성분을 열고 가족과 달아났다. 일본군의 그 성문을 통해 성으로 밀고 들어왔고, 조선 군민 전원이 싸워 장렬히 전사하였다..


신립 (申砬 1546 ~ 1592)

신립은 평산 사람이다.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여 용맹을 떨쳐 평안병사를 역임하고, 지금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선조가 가장총애한 후궁 김씨 소생 신성군의 장인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28일 도순변사의 직책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군 1만 8천명을 충주 남한강변에서 조선군 8천명을 지휘하여 배수진을 치고 요격하였는 일본군의 정보에 어두웠고, 조총의 위력을 경시하여 패전하고 전사하였다.

신립 장군 뒤 평산 신씨는 경진, 준 등 많은 장신이 나오면서 능성구씨와 안동 장씨등과 더불어 3대 무인집으로 발전했다. 호는 충장, 이조판서 상의 손자, 영의정 경진의 아버지, 형조판서 준의 조부.



송상현 (宋象賢 1551 ~ 1592, 본관 여산)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동래성을 빼앗기게 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관복인 조복으로 갈아입고 초루에 올라 단정하게 앉은채로 적을 기다렸다. 적장이 그의 용기에 감동하여 팔을 끌며 피하라고 권하자 태연히 일어나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 충절에 감복한 왜장은 송상현을 죽인 왜병을 목베고 시신을 수습하여 동문밖에 장사를 지냈다. 선조 9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군자감정 등을 지낸 뒤 누구나 가기 싫어했던 동래부사로 나가 위급할 때 도망치지 않고 순절했다. 호는 천곡, 시호는 충렬, 공조전서 희 8대손, 현감 복흥의 아들, 지제교 인금의 아버지.



유정 (惟政/1544~1610)

조선 후기의 승려. 속성 임(任). 본관 풍천(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密陽)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이여송 (李如松 ? ~ 1598, 본관 성주)

명나라의 무장 이여송은 요동 출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기나가가 지휘한 일본군을 격퇴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고려 충렬왕 때 전객부령을 지낸 이천년의 8세손이며 이성량의 아들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조부가 평안도 강계에 살다가 만주의 철령위로 도망쳐 유격 장군에 오른 뒤에 집안이 번창하여 아버지가 좌도독광녕총관병이 되었다고 한다. 이여송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지휘사가 되었다. 중군도독부 좌도독소보 영원백을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의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4만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와 왜군을 격파했다. 문하평장사 승경의 후손, 영원백 성량의 아들.


정문부 (鄭文孚 1565 ~ 1624 , 본관 해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에 투항하고, 이 때 함경도에 피난온 임해군, 순화군이 일본군 제 2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었다.정문부는 이 때 산속에 피신하였다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으로 진격하여 국경인의 숙부인 국세필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했다. 그리고 이어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격퇴하였다. 당시의 함경도 관찰사 윤택연이 정문부에게 자기의 부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정문부는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관찰사가 의병들의 선봉을 숨겨 버렸으므로 의병들은 상을 받지 못하였다. 1624년 초회왕을 소재로 지은 시 때문에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무고받고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한참후인 1714년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한 2만 8천명의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격퇴한 정문부의 공적이 인정되어 길주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호는 농포, 시호는 충의, 호조참의 침의 5세손, 참판 언의의 손자, 부사 신의 아들.


정기룡 (鄭起龍 1562 ~ 1622, 본관 진주)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장군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조총이란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에게 이긴 장군은 그 만큼 뒤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정기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출전하여 거창과 금산에서 적병을 무찌르는 등 60여 차례의 싸움에서 이겨 상주목사 겸 감사대장군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고령에서 크게 이겨 경상우병사에 오른 뒤 삼도통제사로 수군도 거느리며 활약하다가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호는 매헌, 시호는 충의, 철석의 증손자. 좌찬성 호의 아들.

정발 (鄭撥 1533 ~ 1592, 본관 경주)

임진왜란은 조선 선주 25년 15만 명의 왜군들이 부산에 쳐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때 부산진을 시키다 목숨을 바친 장군이 정발이다. 25세 때 무과에 합격하여 부산진 첨절제사로 있을 때였다. 왜군이 침략할 기미가 보이자 그날도 새벽에 부산의 영도로 순찰을 나갔다. 그 때 새벽안개를 뚫고 5백척의 군함에 나누어 탄 수많은 왜군이 몰려왔다. 왜군과 맞닥뜨린 정발은 적 수백명을 무찌른 뒤 성안으로 후퇴하여 성문을 굳게 잠그기 지켰다. 당시 정발 장군이 입은 옷이 검은 장군복이어서 군산들은 흑의 장군이라고 불렀다. 다음날 왜군의 공격으로 성은 무너지고 정발 장군도 순절했다. 그에 앞서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가까운 이웃고을에 알렸지만 겁을 먹은 수령들은 모조리 도망쳐 한 사람도 도우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이런 무훈도 훨씬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조종도 (趙宗道)

조종도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 함양군수를 역임했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전투에서 안음현감 곽준과 함께 잘 싸웠다. 이 때 출전장으로 동북문의 수어를 담당했던 전 김해부사 백사림이 비겁하게 성문을 열고 가족과 함께 동망하여, 그 성문을 통하여 일본군이 성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군기고에 불을 지르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헌 (趙憲/1544~1592)

(묘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 배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東還封事)》 등이 있다.




최경회 (崔慶會 1532 ~ 1593, 본관 해주)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년 뒤인 선조 26년 6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 등이 김해부사 이종인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6월 20일 구로타가 지휘하는 왜군 5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해 성은 일주일만에 함락되고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등 수십명이 남강에 투신했다. 용맹을 떨친 황진 장군은 그보다 며칠 전에 전사했었다. 진주성 함락으로 6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의기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것도 이때다. 논개는 최경회가 사랑하던 연이었다고 한다.

선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행군수를 지내다 부모상을 당해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경명 장군의 격문을 읽고 의병을 일으켜 금산 등에서 싸운뒤 경상우병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에서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순국했다. 부모상에는 벼슬을 버리고 상을 치러야 하는 것이 큰 예였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할 때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기복이라고 하여 이는 예에 앞섰다. 호는 삼계, 시호는 충의, 사재령 공의 6세손, 사직 혼의 증손자, 천부의 아들, 악정 경장의 아우.


휴정 (休靜/1520~1604.1.23)

조선 중기의 승려·승군장(僧軍將).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황진 (黃進 1550 ~ 1593, 본관 장수)

충청병사 황진은 진주성이 왜병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창의사 김천일 등과 함께 싸우다 순국했다. 선조 5년 무과에 급제하여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와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언했었다.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을 따라 수원, 상주 싸움에서 적을 쳐보수고 충청병사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기 수일 전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을 안 선조는 좌찬성에 추증하고 고향에 정문을 세우게 했다. 시호는 무민, 영의정 희의 5세손, 호조판서 치신의 현손, 현령 정열의 아버지.



 
출처 : 북관대첩비 반환블로그 |글쓴이 : 의병장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