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서문. 1. 안중근 의사의 생애 2.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살해 이유. 3.안중근 의사의 재판정 기록 4.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 5. 안중근 의사가 실탄 한 발을 남긴 까닭. 6.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7. 안중근 의사의 유언. 8. 마치면서.
안중근(안응칠) 의사.
우리가 아는 안중근 의사는 대한 민국의 독립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민족의 영웅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는 짧은 인생속에서 우리의 독립 투쟁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고, 나아가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뜨겁게 알렸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을 이번에 새롭게 접근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한국에 송환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서 안중근 의사의 새로운 면모와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알게 되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함께 서술하려고 한다.
1.안중근 의사의 생애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1979년에 출생하여 1910년 3월 26일 32살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깊은 인생을 살아온 안중근 의사의 삶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삶이 아닌 민족과 국가를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태어날 때 가슴에 7개의 별이 있다하여 안응칠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이러한 꿈과 함께 민족의 희망으로 세상을 마쳤다.
조국을 건지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연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야말로 안중근의사다.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요 문성공 안유의 이십대손으로 1879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읍에서 태어났고, 조부는 진해 현감을 지낸 인수공으로 덕망이 높았다. 부친은 성균진사 태훈공이었으며 모친은 백천조씨인데 의사는 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개가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이름을 안응칠이라 불렀다. 어려서 글을 배워 문사의 앞날도 기약되더니 일곱살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질을 엿 볼수가 있었다. 16세 때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 무리들이 일어나자 부친이 모집한 장별들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진압한 후 결혼하였다. 이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또 이어 도마라는 세례명을 얻은 동시에 홍석구 신부에게서 프랑스말과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10년이 지나 27세때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안장한 뒤 이듬해에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웠고, 이후 직접적인 무장 투쟁을 위하여 29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이름을 띠고서 무력에 의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30세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고 회령에서는 일본수비군과도 격전하였다 31세에 노령에서 결사동지 11명과 함께 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로 새기었다. 그러자 이등박문이 러시아 대장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의사는 이때야 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때라 하고 원흉을 없애려 하얼삔에 이르렀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반 삼엄한 하을삔역 머리에 각국 대표의 환영과 군대의 호위속에 하차한 이등박문은 단신으로 달려든 의사의 사격 4탄에 즉사하였다.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대한국만세를 세 번 외친 다음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 헌병의 손에 태연히 포박되었다가 곧 다시 일본관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통쾌한 소식을 전파를 통하여 세계 각국에 널리 퍼지자 우리와 중국인민들로서는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거니와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다섯 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특히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 평화론 등을 집필하는 한편 매양 법정에서 한국의 국토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 등 이등박문의 열다섯 가지 큰 죄목을 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논설했다. 일제의 재판은 마침내 2월14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에게도 각각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사는 2천만 동포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긴 뒤 새 옷을 갈아입고 여순 감옥 현장에서 조용히 순국하시니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요 향년은 32세라 비록 육신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은 준생 현생 오누이와 손자 웅호를 끼쳤을 뿐이로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살해 이유.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3. 안중근 의사의 재판정에서의 발언.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 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수십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 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 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
사형 언도를 받고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 채 자신의 사상을 이루는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안중근 의사는 저술을 마치기 위해 당시의 법원장에게 집행 연기를 신청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3월 26일 에 사형이 집행되어 안중근 의사는 불과 10여 일 동안에 '동양평화론'의 머리말과 제1장인 전감(前鑒)의 일부분밖에 쓸 수가 없었다.
'동양 평화론'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동양 평화론'은 일본, 한국, 중국이 각기 자주 독립국으로서 힘을 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데 근본정신 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감추기 위해 주장햇던 '아시아 연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쓰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는 한편, 형무소장에게 부탁해 홍석구(洪錫九)신부로부터 마지막 고해 성사를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고 자신의 투쟁 이론을 ‘동양평화론’으로 정립할 만큼 투철한 사상가였다. 이토 저격은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투쟁해온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재판정에서의 행동과 말은 미완성인 동양 평화론의 요지를 적게나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에 입각한 행동◎
1908년 6월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으로 일본군 공격에 나섰다. 두달전 경흥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 진지를 점령하는 승리를 거둔 안중근 부대는 또 다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0명 가까운 일본 군인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에 대해 석방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포로들에게 무기까지 돌려주었다. 의병들은 안중근의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일본군은 한국 의병을 생포하면 즉시 총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들어 포로라도 죽여서는 안되고 포로수용소가 없으니 석방할 수밖에 없다며 석방을 강행했다.
포로 석방으로 안중근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석방을 놓고 의병들간에 갈등이 커져갔고, 부대를 이탈하는 의병들도 나타났다. 더 비싼 대가는 석방 포로들에 의해 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안중근 부대는 참패했고, 이후 안중근 의병은 결성 1년도 안돼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안중근은 왜 의병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적군인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을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입각한 인도적 처리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로서 안중근의 면모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5.안중근 의사가 실탄 한 발을 남긴 까닭.
안중근 의사는 권총의 총알을 이등박문에게 7발중 6발을 쏜 후 한 발은 권총안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자신이 자결을 할 수 있음에도 자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연하게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저격한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부당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체포 후에 이어질 죽음보다 더한 고문과 고통을 알면서도 자결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 안중근 의사는 이후에도 재판정에서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저격 이유를 당당하게 말해서 재판관들이 당황해 할 정도 였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는 개인의 안위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법정 진술
'이번의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 동양전체의 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나는 3년간 군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나갔다. 이번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내 나라를 침략한 적에게 한 것이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으나,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 의사 는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태도에는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2월 19 일, 안중근 의사가 항소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고등 법원장 히라이시(平石)는 일부러 형무소로 안중근 의사를 찾아와 항소할 것을 권했으나, 안중 근 의사는 찾아와 항소하지 않은데에는 옳은 일을 했으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 겠다는 본인의 굳은 의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놀라운 애국심이 뒷받침이 되어 있 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안중 근의사의 두 동생을 급히 여순(旅順)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옳은 일을 하 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이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의 대한 매일 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7.안중근 의사의 유언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 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3년 동안 해외 에서 풍찬 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 을 달성 하지 못하고 이곳 감옥 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동포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 하야 학문 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 하야 나 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 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동생 정근 공근 형제와 홍 신부 에게 유언◎
내가 죽은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