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동의보감>과 광해군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해군 때 출간된 의학 백과사전으로, 지금도 한의사들에게 기본이 되는 교과서이다.<동의보감>은 그 유명세를 국내에서만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발간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극찬을 받았으며, 지금 까지 20여차례나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의학백과사전<동의보감>하면 우리는 저자 허준만을 떠올린다. 사실 명의 허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동의보감>이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에는 또 한 사람의 공로자가 있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과 <동의보감>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기 시작한건 선조 29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의학책을 만들라는 선조의 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대신들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허준에게 물어 허준을 탄핵한다. 이임금이 죽으면 어의에게 책임을 묻던 시대였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은 허준의 탓이 아니라며 허준을 보호해 주려 한다. 그러나 극형을 요구하는 대신들의 탄핵이 그치지 않자 광해군은 허준에게 유배령을 내려 탄핵을 일단락 지으려고 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허준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한다. 낮에는 인근 산을 다니며 약초를 연구하고, 밤에는 책을 썼다. 그러나 대신들은 허준이 유배지에서 근신하지 않고 집 밖으로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며 허준을 위안리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안리치란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유배형이다. 일부 대신들은 극형을 요구하기도 했다.그러나 광해군은 완강하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준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
광해군의 바램대로 유배지에서 풀려난 디 1년뒤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시킨다. <동의보감>이 완성되던날 책을 받아즌 광해군은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왕의 명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여 유배된 뒤에도 집필을 쉬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책을 완성했다. 실로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렇게 광해군은 대신들의 집요한 탄핵에도 허준을 보호해 주었고, 그로 인해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럼 광해군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허준을 보호해 주었을까?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누구나 쉽에 읽고 스스로 처방할 수 있는 의학서적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때다. 광해군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강을 바로잡아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7년간의 전쟁은 당시 조선의 기본사상인 유교사상마저 뿌리째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보면,
"선조가 죽고 난 뒤 국상 중인데도 별궁 근처 민가에서 나는 창가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 따지 들렸다."
-선조 32년5월
"경상도 의성에는 간밤에 향교가 부서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향교에 모셔져 있던 위패가 더럽혀져서 뜰 가운데 버려지고 문밖에 던져져 있었다."
-선조26년12월
광해군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을 시행했다. 우선 즉위하자마자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궁궐을 수축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차례로 준공했도, 뒤이어 경희궁을 창건했다. 당시 궁궐 수축을 하는 데 백성들의 고충이 컸다.
그러나 당장 왕이 기거할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터에 궁궐 수축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궁궐 수축은 왕실의 권위를 살리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한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 각 고을의 효자와 충신·열녀를 가려내어 포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과 사연을 감아<동국신속상감행실도>라는 책을 낸 뒤 전국에 배포했으며, 집권 3년째 되던 해엔 유교성현들을 문묘에 모시기도 했다. 김광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이렇게 다섯 명을 문묘에 모시고 배향했다.
광해군은 또한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불타 버린 각종 서적들을 복간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조보감>과 종합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이다.
또한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와 청주사고가 불타 없어지자 산성이 있어 방어력이 뛰어난 적성산성에 사고를 설치해 실록과 중요 서적들을 보관 했다.
이로써 연산군으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책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출처 : 블로그 > 깨우침 | 글쓴이 : mimi [원문보기]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해군 때 출간된 의학 백과사전으로, 지금도 한의사들에게 기본이 되는 교과서이다.<동의보감>은 그 유명세를 국내에서만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발간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극찬을 받았으며, 지금 까지 20여차례나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의학백과사전<동의보감>하면 우리는 저자 허준만을 떠올린다. 사실 명의 허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동의보감>이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에는 또 한 사람의 공로자가 있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과 <동의보감>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기 시작한건 선조 29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의학책을 만들라는 선조의 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대신들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허준에게 물어 허준을 탄핵한다. 이임금이 죽으면 어의에게 책임을 묻던 시대였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은 허준의 탓이 아니라며 허준을 보호해 주려 한다. 그러나 극형을 요구하는 대신들의 탄핵이 그치지 않자 광해군은 허준에게 유배령을 내려 탄핵을 일단락 지으려고 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허준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한다. 낮에는 인근 산을 다니며 약초를 연구하고, 밤에는 책을 썼다. 그러나 대신들은 허준이 유배지에서 근신하지 않고 집 밖으로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며 허준을 위안리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안리치란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유배형이다. 일부 대신들은 극형을 요구하기도 했다.그러나 광해군은 완강하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준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
광해군의 바램대로 유배지에서 풀려난 디 1년뒤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시킨다. <동의보감>이 완성되던날 책을 받아즌 광해군은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왕의 명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여 유배된 뒤에도 집필을 쉬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책을 완성했다. 실로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렇게 광해군은 대신들의 집요한 탄핵에도 허준을 보호해 주었고, 그로 인해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럼 광해군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허준을 보호해 주었을까?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누구나 쉽에 읽고 스스로 처방할 수 있는 의학서적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때다. 광해군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강을 바로잡아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7년간의 전쟁은 당시 조선의 기본사상인 유교사상마저 뿌리째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보면,
"선조가 죽고 난 뒤 국상 중인데도 별궁 근처 민가에서 나는 창가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 따지 들렸다."
-선조 32년5월
"경상도 의성에는 간밤에 향교가 부서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향교에 모셔져 있던 위패가 더럽혀져서 뜰 가운데 버려지고 문밖에 던져져 있었다."
-선조26년12월
광해군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을 시행했다. 우선 즉위하자마자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궁궐을 수축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차례로 준공했도, 뒤이어 경희궁을 창건했다. 당시 궁궐 수축을 하는 데 백성들의 고충이 컸다.
그러나 당장 왕이 기거할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터에 궁궐 수축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궁궐 수축은 왕실의 권위를 살리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한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 각 고을의 효자와 충신·열녀를 가려내어 포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과 사연을 감아<동국신속상감행실도>라는 책을 낸 뒤 전국에 배포했으며, 집권 3년째 되던 해엔 유교성현들을 문묘에 모시기도 했다. 김광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이렇게 다섯 명을 문묘에 모시고 배향했다.
광해군은 또한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불타 버린 각종 서적들을 복간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조보감>과 종합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이다.
또한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와 청주사고가 불타 없어지자 산성이 있어 방어력이 뛰어난 적성산성에 사고를 설치해 실록과 중요 서적들을 보관 했다.
이로써 연산군으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책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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