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의 효시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7. 17. 12:47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의 효시로는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린 '양무호(揚武號)'와 그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광제호(光濟號)'를 꼽는다.

 

국내에서 군함 도입을 계획한 것은 1902년. 당시 고종황제는 해군창설을 위해 일본에 군함 구입을 의뢰했고, 다음해 미쓰이물산합명회사(三井物産合名會社)가 군함을 납품함으로써 4월 15일 인천항에 국내 첫 근대식 군함이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된 후 선원실습선으로 사용되던 당시의모습


 

고종이 1904년 도입한 광제호

 

고종황제는 이 군함의 이름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라 지었다. 하지만 양무호는 원래 영국상선이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조잡하게 만든 탓에 군함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결국 근대문물에 어두웠던 우리 정부를 우습게 여기던 일제가 농간을 부려 돈만 챙긴 셈이었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호(Pallas)라는 화물상선이었다. 배의 규모는 3천4백24t, 1천7백마력으로 원양 항로에 취항했던 것을 미쓰이물산이 25만원에 구입해 일본-홍콩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배를 움직이는데 하루 43t의 석탄이 쓰이면서 골칫거리로 남자, 이 배에 고물 대포를 걸어 놓고 우리 정부에 팔았던 것이다.


 

1906년 군함이 아닌 세관 감시선으로 업무가 바뀐 광제호

선상에서 사관과 선원, 세관요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25만원에 사서 9년간 쓴 배를 55만원이란 거금에 넘겼으니 일본에 사기를 당해도 크게 당한 꼴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독일 신문에도 크게 보도돼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황성신문도 “한명의 수병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을 사들여 재정을 낭비했다(1903년 6월 1일자)”고 비판했다.

 

양무호는 인천에 닻을 내린 이후에도 배값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일본 군함에 의해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하다가 그 해 8월 22일 시운전을 거쳐 우리 군함으로서 정식 등록했다.

 

양무호의 초대함장은 박영효의 추천으로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 동경상선학교(東京商船學校)에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았던 신순성(愼順晟)씨가 맡았다. 신함장은 당초 일본에 건너가 해군사관학교에 진학, 국내에서 해군사관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 해군사관학교가 일본인에게만 입학을 허락해 상선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양무호는 신함장을 비롯 72명의 대원이 맡았으나 배가 워낙 낡은 데다 당초 일본이 운항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군함의 연료인 석탄 대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항구에 정박해 있기 일쑤였다.그러다 러·일 전쟁시 일본 해군에 강제로 징발당해 첩보함으로 사용됐으며 전쟁 후엔 화물선으로 개조, 2년만인 1905년 7월 인천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양무호는 군함의 임무를 펴보지도 못한 채 러·일 전쟁 후 1907년 부산항에서 선원실습용으로 사용되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상점(原田商店)에 4만2천원에 매각,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양무호 문제로 속을 태웠던 우리 정부는 일본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에 1천56t급 광제호를 새로 건조했다. 1904년 11월 인천항에 모습을 드러낸 광제호엔 신순성씨가 다시 함장으로 부임했다.

 

광제호는 3인치 포 3문을 장착하고 서해안 경비를 담당했다. 하지만 광제호 역시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단 1년만에 끝내야 하는 시련을 겪는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총독부 체신국 해사과에 소속, 인천항을 모항으로 서해안 연안관리시설과 세관 감시선으로 운영된 것이다.

 

광제호는 1910년 한일합병이 공포되기 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운항했다. 신함장의 장남인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박사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공표하기 전날 밤 광제호에 달았던 태극기를 내려 일제 36년 동안 집에서 보관해 왔다”며 “1945년 해방되던 해에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일장기와 바꿔 달았다”고 회고했다. 이 태극기는 가로 1백42㎝X세로 82㎝ 크기의 대형기로 지금의 태극기에 비해 태극 중앙선의 경사를 급하게 그려놓고 있다.

 


노일전쟁 해전도
당시 인천에 정박중인 각국 군함의 이름 등을
일어와 영어로 상세히 적고 있다.
 
광제호는 1912년 일본이 행정정비를 단행하면서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을 당한 뒤 일제가 설립한 조선우선주식회사에 넘어가 상선으로 이용된다. 이후 1918년 인천축항이 준공되면서 광제호가 항내로 접안하자 한때 서구식 대형 기선을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1904년 2월 9일 러시아와 일본은 월미도 앞바다에서 전쟁을 벌였다.
사진은 러시아 포함 '코리에츠호' 최후의 모습
 
인천에 해원양성소(현 인천해사고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광제호는 실습선으로 활용됐으며, 신순성씨가 선장겸 교관을 맡았다.
 
광제호는 이어 원산-청진간 연락선으로 쓰이다 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진해로 옮겼다. 여기서 태평양전쟁 전인 1940년까지 진해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이용됐고, 1941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사정책에 따라 석탄운반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인들이 부산항을 통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광제호의 운명은 또 한번 바뀌게 된다. 신태범 박사는 "일본인들이 패망 후 철수에 이용했던 배가 광제호였다는 얘기를 세월이 한참 지난 뒤 당시 이 배를 탔다는 일인 중학교 동창에게 들었다"며 "한 나라의 해군 함정이 침략자들의 철수용 선박으로 이용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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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경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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