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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천 8백년 전 우리 민족은 문자를 사용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2009. 9. 13. 21:15


5천 8백년 전 우리 민족은 문자를 사용했다

한자의 뿌리가 된 세계최초의 문자 녹도문
고대문명의 중요한 조건이 문자의 사용이다. 문자는 살아있는 유물이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대유물인 동시에 그 변천 과정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포함한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서 일찍이 문자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BCE 2000~1500년경의 도화문자(圖畵文字)) 동아시아지역에서 문자가 창제되기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도 통용되었다.


고조선이 개국되기 훨씬 전인 신시배달 건국 때부터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배달국 환웅천황은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 神誌文字)을 창제하였다. BCE 39-38세기경에 창제된 이 녹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BCE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script, BCE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다. 환단고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부터 낭하리 고각,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창힐문자,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의 문자, 은나라의 갑골문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의하면 5세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가 녹도문을 개량하여 용서(龍書)를 만들고 이것을 주양(朱襄)씨가 육서(六書)로 남겼다고 한다(朱壤仍舊文字而始傳六書). 이것이 이른바 삼황오제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이다.

참고로 ^^)... 금문(金文)이란 문자가 창안된 역사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나무류와 동물의 껍질, 뼈다귀, 돌,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한다. 시대별로 상고금문(上古金文?五帝金文: 삼황오제시대로부터 하(夏)왕조 때까지의 문자), 은주금문(殷周金文: 은(殷)나라 갑골문, 주나라 대전(大篆)), 춘추금문(春秋金文: 진시황 때의 소전(小篆))으로 나눌 수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27-28쪽)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 연구한 중국학자 낙빈기(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이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 문자들을 만들어 사용한 주체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상고금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한자(漢子)로 완성되었다.
배달국에서는 숫자로서 산목(算木)이 통용되었고 14세 자오지 환웅천황 때는 화서(花書: 佃目)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바로 아래 그림).

자오지 환웅천황의 동방통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전부터 개량돼오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중원에도 전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창힐문자(倉?文字: 鳥跡書)다. 현재 창힐의 고향 백수현 사관촌(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위 사진의 중간에 있는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에 새겨진 글이 창힐문자다.
창힐은 헌원의 신하로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鳥跡書)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자오지 환웅천황의 제후로서 배달국 문자(鹿圖文)를 서방에 전하여 동서문화 통합을 시도한 동이족이었다. 창힐문자가 배달국 녹도문과 모양이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창힐문자는 복희?주양씨 이래 중원지역에서 사용되던 옛 문자(六書)와 뒤섞여 은나라 갑골문의 뿌리가 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하며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했다. 그는 갑골문자를 들고와 유통시켰다. 고조선에서 사용되던 신지문자보다 개량된 다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加臨土)문자, 하나는 신지문자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고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서토지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갑골문 및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지자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BCE 8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더욱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면서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고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되었다.

한글의 원형은 고조선 가림토문자
21세기의 벽두, 우리 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 매김 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 속도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함 때문이다.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있다. 한글은 왼손(陰), 오른손(陽)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하며 그 어떤 문자도 이것을 따라올 수 없다. 일본의 히라까나 가타카나나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한다.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는 며칠이 걸리고 한문은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기 어렵다.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문자도 감히 이것을 흉내내지 못한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은 서양의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민족 종교 증산도의 경전인 증산도 도전에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 통어케 되며 한자는 간단하고 쉬운 것만 사용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단군 가륵 2년(BCE 2181)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字)를 창제했다는 기록과 함께 글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도 참고하시라 ^^)... 조선 선조때 조여적(趙汝籍)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 그의 이름이 실려있음돠.

그런데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며,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과 큐우슈우(九州)의 신궁(神宮)에서 자주 발견되는 아히루문자(阿比留神字, 神代文字)와도 유사한 점이 대단히 많다. 그리하여 일본의 학자들 대부분은 아히루문자(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한글의 원형이 되었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있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 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한글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독창적이었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여기에 나오는 옛 전문을 몽고 파스파 문자(蒙字)나 한자(漢子) 자체(字體)의 하나인 전서(篆書) 또는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몽고문자나 전서, 범자와 닮은 데가 전혀 없다. 인류문명사에서 한글처럼 고도의 체계를 가진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물에 의해서 발명된 사례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이 나라 한글 학자들의 주장은 역사발전법칙도 무시한 터무니없는 억설일 뿐이다.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른다. 이 무렵에 일본열도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 가림토 문자를 번역한거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한 것인데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 인도로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송호수 교수가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다. 오늘날 구자라트주에는 주로 드라비다인(Dravidian)들이 거주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가림토 문자가 인도로 건너간 계기는 무엇일까?
부도지에 따르면 순임금의 부친 유호(有戶: 고수)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月息)?성생(星生: 인도로 추정됨)의 땅으로 들어가 교화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을 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인더스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지중해 인종(그리스인)과 유사한 혈통과 신화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드라비다인의 프로메듀 신화와 동일하다고 한다. 아울러 거석문화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에 사는 드라비다인은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다른 드라비다인과 달리 언어까지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다. 그 실례를 든다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이다. 여기서 ‘쌀과 메디, 벼’라는 단어는 고조선과 인도지역간의 농경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문제는 벼농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이미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국가

도읍지

동방 고대 문자의 계보

배달

신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의 녹서(鹿書, 녹도문, 낭하리의 암각)
산목(算木) 사용 → 부여의 서산(書算)으로 계승
태호 복희의 용서(龍書, 육서(六書)의 원리가 제정됨 → 이른 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 갑골문과 한문의 먼 뿌리 한문), 최근 출간된 금문신고(金文新考)에서 상고금문을 사용한 주체가 한민족이었음이 드러남(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청구

치우천황의 화서(花書, 이른바 鬪佃目)
창힐(倉?)이 배달국 신지문자를 배워 중원에 보급

고조선

아사달

신전(神篆, 녹서를 계승한 문자, 이른 바 요녕성에서 발굴된 고조선 토기문자) 사용
가림토(加臨土)문자 → 3세 가륵 단군 때(BCE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지은 원시한글.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가 됨, 훗날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으로 재현됨
은(殷)나라에서 상고금문을 계승한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 한자의 기원이 됨

백악산

중원지역과의 교류가 확대되고 은(殷)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면서 고조선에 갑골문자가 유통됨
주(周)나라 대전(大篆)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함
가림토문자가 BCE 7세기경 일본의 건너감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장당경

신지문자와 가림토와 한문이 병존하다가 한문(이두법 사용)으로 일원화됨

북부여

진(秦)나라의 소전(小篆)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이 부여(숙신)에 사신으로 와서 한수(漢水)에서 얻음 → 예서(隸書)

열국시대

한(漢)나라 채옹의 팔분(八分), 한예(漢隸)
후한(後漢)의 왕차중(王次中, 왕문의 후손)이 개량 → 해서(楷書)

경기도 일산과 청원군 소로리 등지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야생벼가 아닌 농경의 흔적이었다.

알아둬염 ^^)..... 최근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는 지난 97년 11월부터 98년4월까지 5개월간 충북대, 단국대, 서울시립대 박물관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바 있다.

그 결과 구석기 유적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고 특히나 지하 1.3m 토탄층에서 20여알의 볍씨가 출토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볍씨는 탄소 연대측정결과 1만3천년~1만7천년전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이는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로 기록된다.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河姆渡)유적 볍씨는 7천년전이고 회하(淮河)의 볍씨는 8천5백년 정도다.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훨씬 이전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천년전의 경기도 일산 볍씨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 볍씨가 재배벼인지, 야생벼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이중 일부는 재배벼의 흔적이 있다. DNA 분석결과 「고대벼」라 불리는 이 볍씨는 현재의 재배벼와 약 40%정도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이 볍씨가 재배벼라면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역사는 대폭 수정해야 할 정도다.

따라서 고조선인들이 인도로 건너가 일부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도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고조선의 풍속과 과하마(果下馬, pony)가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까마득한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민족은 멀리 인도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장두형 인종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민족은 이처럼 오래 전부터 국제화?세계화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의 일부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착각한 것이다.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글쓴이 : 老宿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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