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펌 ) 광주 사태 현장

거자필반(去者必返) 2010. 2. 17. 18:59
광주사태 현장 | 5.18광주민중항쟁관련
2006.06.19

▲ 518 당일 전남대앞 / 군인들의모습에서 총이 보이지 않는다.

 


▲ 버스로 군인들을 밀어 깔아 죽이는장면

 

▲ 시민군 모습

 

▲ 시민군과 기관총

 

▲ 시민군 구호표어(전두환 대갈통 세맨트바닥에 깔아버리자)

 

▲ 시민군이 몰고 다니는 장갑차

 

▲ 시민군이 타고 다니던 트럭

 

 

 

다음은 현지에 있던 분들의 증언들을 모아 봤다.

1) 5월 18일 전남대 충돌은 우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군부집권을 반대한 시민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시위한 것이 5월의 봄입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충돌상황은 대모하는 전남대 학생들과  진압하는 공수부대가 맞닥뜨렸는데 투석전과 경찰 차량 방화가 일어나자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옷을 벗겨 과잉 진압했습니다

우발적인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상황은 당시 서울 부산 대구등 전국적으로 있었습니다

(즉 5.18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후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2)그런데 오후들어 윤상원의 시민군들이 투사회보를 살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말리러 온다

대검으로 뱃속에 태아를 꺼집어 내었다

대검으로 임산부의 유방을 도려내었다

등 이었습니다

 (사실 대검은 탄소합검으로 되어있어 찌를수있지 유방을 도려낼수 없습니다)

 

<투사회보 내용의 일부>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일반 시민들은 유언비어에 흥분하여  거리로 몰려시위를 하고

윤상원 조직들은 관공서에 불을 지르고 나주 화순 등지에서 무기고를 탈취하여

배포했습니다 

윤상원 조직들이  상점등을 약탈했다는 것은 같은 호남 분의 증언입니다.

 

불타는 관공서

  

그리고 전남도청에 8t달하는 다이너 마이트를 설치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폭발했다면 전남도청으로 직경4km 가 폭발해 광주시가지가 사라졌을 것이고 수천명이 사상할 위력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건 행위였지요

 

이는  전남대 5.18연구 자료에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 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뇌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략)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사건후 5.18 총상자를 조사했는데

민간인 사망자 162명을 시검한 결과 M-1과 칼빈 소총에 의한 총상이 117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당시 윤상원조직들이 무기고에서 탈취해 간 총이 M-1과 칼빈 소총이다. 계엄군은 모두 M-16소총으로 무장돼 있었다고합니다...

 광주 5.18단체도 이에대해 아무런 반론을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인들의 발포 후 무기를 탈취했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주 화순 까지 가서 예비군 무기고의 수천정의 총기를 들여올 수 있으며 8t에 달하는 다이너 마이터를 전남도청에 설치했겠습니까?

 

1980년 5월 19일부터 무장한 시민군의 맹렬한 교도소 습격과 도청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던 계엄군이 5월 21일 오후에 광주 외곽으로 부득히 철수하여야 했던 것은 시민군 장갑차 부대의 공격을 더 이상 맨몸으로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 때 국군이 장갑차 부대를 편성하는데 3년 이상이 걸렸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미군으로부터 장갑차를 인수받은 후에야 국군에 장갑차가 생겼으며, 장갑차 운전병을 양성하여야 했다. 그런데 시민군은 사흘 만에 기관총과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는 물론 장갑차로 무장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공수부대원들도 다룰 줄 모르는 것이 장갑차 운전이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5시 40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시민군이(그들은 폭도보다 시민군이란 명칭을 선호함) 돌과 화염볍으로 광주 파출서들을 파괴하며 순경들을 붙잡아 가서 묶어 놓고 때렸다. 도망가는 순경 집에까지 쫓아갔기에 경찰이 모두 광주 외곽으로 피하였다. 근무지가 광주인 경찰이 광주 외곽에 가서 숨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미처 피하지 못한 순경들은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그 다음날부터 한 명 한 명 죽어갔다. 여기에 시민군에 납치된 순경들의 생명을 구하가 위해 광주경찰서장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광주향토사단에 시위 진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광주향토사단의 지휘권은 광주 사람 정웅 소장에게 있었으며 타 지휘관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정웅 소장이 군번으로는 당시 장성들 중에서 최고참에 속하였기 때문에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합부로 관여할 수 없었던 것이 정웅 소장의 지휘권이었다. 상황 판단, 시위 진압 시간, 진압의 강도 등은 정웅 소장의 판단에 일임된 문제였다. 따라서, 순경 살인이나 무기 탈취 등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시민군에게 물어야 할 일이요, 진압 방법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웅 소장에게 물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서울대 3학년 유언비어 제조기들과 광주 시민군은 서로 죽이 맞아 "전두환 광주학살" 픽션 소설을 써왔다.
한홍구 등 픽션소설가들은 "신군부"라는 말을 무슨 요술방망이처럼 사용하였다. 실제에 있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이나 황영시 부계엄사령관이나 광주사람 정웅 소장은 하나회 회원도 아니었으며, 한홍구와 운동권이 말하는 신군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픽션 소설을 쓸 때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이나 황영시 부계엄사령관"을 신군부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여기서 온갖 논리적 미끄러짐과 비약이 시작된다. 본래 광주사태는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관이요, 육본은 치안본부 요청에 따라 행동하였기에 보안사와는 아무 관련 없었던 일이요, 전두환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던 일이 광주사태였다.

시민군이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광주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경관들에게 폭행을 가하였으면,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무기와 실탄을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하였으며, 방송국과 세무소 등에 방화하였으며, 마침내 도청을 점령하였으면, 그리고 5월 18일 매맞은 경관들 중 나중 사망자가 생겨 전체 광주사태 희생자 중 삼분의 일은 군경이라면 시민군 편에서도 책임져야 할 문제는 있다. 그러나 왜 전두환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는가?

 

출처 : 세상사 바로보기 |글쓴이 : 증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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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수부대 작전병 김치년이 쓴 광주사태의 생생한 드라마 | 5.18광주민중항쟁관련
2006.06.19

     부마사태 진압 경험


지금처럼 전직 대통령도 구속되는 마당에 여론의 힘을 업은 현재의 상황에 맞서 누가 나서서 우리의 입장을 증언을 해줄 것인가. 아마도 내가 이제야 그 일 중 하나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던 3여단은 5여단과 함께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서 진압을 수행했다. 계엄군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이었다. 그런데 부마사태의 진압경험을 가진 3,5여단이 광주에 처음부터 투입되지 않고, 경험이 없는 7여단 병력을 투입한 것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3공수여단은 당시 성남 비행장에서 C-123기를 타고 부산으로 공수됐다. 우리에게 정확한 작전 명령이 하달된 것은 비행기 안에서였다. 지휘관은『현재 부산지역에서는 매우 심각할 정도의 데모가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평소 훈련대로 충정작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간결한 명령을 했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동아대 운동장에 숙소 텐트를 치고 무력시위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장비는 소총과 70cm의 진압봉 및 매우 거추장스러운 투석망과 방독면이 전부였다. 우리는 2.5t 군용 트럭에 탑승해 하얀 장갑을 끼고 부산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이것은 공수부대의 위압감을 시민들에게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한 시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도 우리 차량을 향해 간간이 투석하는 데모자도 있긴 했지만, 우리는 단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약 3시간여에 걸친 시내 운행을 끝낸 뒤 주둔지에 돌아와 곧바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내 부산 시청 근방에 배치되었는데 이때 여단장(당시 최세창 준장)은『명령 없이는 어느 대응도 하지 말라』는 매우 강도 높은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거점을 지키고 있는 동안 오후 8시가 넘자 점차 시위대 수는 줄어만 갔다. 그리고 오후 9시가 넘어 불과 3~4백 명의 시위대가 남았을 무렵 비로소 시위진압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진압작전은 20~30분 만에 끝날 수 있었다. 이때 우리가 부산 시위대에게 곤봉으로 타격을 가한 것이 7공수 여단이 광주에서 가한 것보다 약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단번에 결판을 내야 했으니 강하고 약하고를 가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틀 정도에 걸쳐 실시한 진압작전은 매우 효과적인 반응이 나타나 더 이상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진압작전 지휘가 사태악화 시켜


여기서 부마사태와 광주사태의 진압작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 부산의 3공수, 마산의 5공수여단은 낮에는 절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과의 충돌이 적었다. 주동자급의 데모는 야간에 이루어졌고, 주력시위 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의 진압은 신속하고 효과적이었다. 비록 진압봉으로 타격을 받아 유혈이 낭자했어도 광주에서처럼 대낮에 구경하던 사람들을 흥분시킬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광주의 경우엔 대낮에 유혈 진압을 실시하여 많은 시민을 흥분시켰다.

둘째, 부마사태 당시 체포된 시위자들은 민간인이었기에 즉시 경찰로 인계하였으므로 시민과 군의 직접적인 감정충돌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경우 인계받을 경찰도 제대로 남아 있지 못했다.
  
필자는 당시 한국 사회가 시위대와 진압군의 존재를 필요악처럼 인정한 사회였다고 본다. 데모도 있어야 했고, 국가 안보와 사회질서도 지켜야 했던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압만이 무조건 잘못이고, 시위대는 무조건 영웅이라는 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결과만을 놓고 지금처럼 진압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 우리 같은 군인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5.20일, 3공수 여단장, “절대 대항하지 말라”


필자의 주장은 진압군 측의 진압 미숙이 법정에 섰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시위대에게도 책임은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덮어버린 채 정치적으로만 몰고 가는 작금의 사태는 훗날 두고두고 한국사회의 갈등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부마사태가 가라앉은 다음, 3공수여단은 서울 주둔지에 있었다. 광주로 투입된 것은 1980년 5월 20일 새벽이었다. 오전 1시에 5개 대대가 청량리 역에 집결해 열차편으로 광주로 향했다. 우리가 출발할 무렵, 광주에서는 이미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작전을 수행하고 잇었다. 오전 7시에 광주역에 도착하자 7공수 병력 일부가 역 광장에 주저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매우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다. 이미 부마사태 경험을 한 우리는 그들에게 안됐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만큼 우리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전남대학교로 진주했고 인근 부대에서 가져온 식사를 마치고 곧 시내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참여한 3공수여단 병력 1천3백92명은 전남대학교의 강당(체육관일 수도 있음)에 모여 최세창 준장의 훈시를 들었다.

“지금 광주 지역은 부마사태와 달리 매우 심각한 상황이니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명령 없이는 절대 대응하지 말라. 특히 용공분자가 합세해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으니 모든 지휘관과 장병은 매우 신중한 진압 작전을 전개해야 한다. CS탄(개인휴대용 최루탄)과 E-8 발사통(64연발 다연장 최루탄통)외에는 모든 것을 사용금지하며 아울러 명령 없이는 어떤 대응도 하지 말라”

우리가 전남대학교에 처음 진주했을 당시 대학 교정 곳곳에 쓰여 져 있는 대부분의 구호는 붉은 글씨였다 그 내용은「김대중 석방하라」「전두환 물러가라」「농민수탈금지」등이었으며, 이를 본 필자와 부대원들은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용공분자」들의 행동이라고 믿게 됐다.


                                               광주의 첫 모습은 빨갱이 세상이었다


1987년 이후 대학가에 나붙은 구호들이 붉은 색으로 써 있고 북한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 게시되더라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1980년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정국이었던 만큼 대학가에 나붙은「붉은 색 구호」는 그만큼 우리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시위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씨를 석방하기 위해 시위를 했다 하더라도 굳이 붉은 색을 사용했어야 했는지, 게다가「농민수탈금지」등 당시로서는「용공」이라고 오해를 받을 일을 자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호들 가운데 나와 같은 하급장병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다름 아닌「전두환」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군부의 실세구나」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진압군인들과 전두환씨와의 관계설정이 현실적으로는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렵 우리에게는「내가 지키는 이 국토에서 어떠한 용공적인 준동은 용서할 수 없으며 조국을 지키겠다」는 특수전 부대의 군인정신만이 있었을 뿐이다.

잠시 그 무렵 우리 부대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자. 광주에 투입된 3공수 12대대는 장교 50명에 사병이 2백50명 정도였다. 이중 장교의 학력을 보면 김완배 대대장과 작전참모, 본부중대장을 비롯 약 4명이 정규 육사 출신이었고 ROTC 출신이 약 8명이었다. 나머지 장교들은 3사관학교 출신들이어서 대학가 문화를 제대로 인식할 기회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사병 2백50명의 구성을 보면 상사 25명, 중사 80여명, 하사 120명 정도이며 일반사병은 불과 25명 뿐이었다. 하사관들은 대부분이 고졸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2년제 대학 포함)을 접해 본 이는 10여명이 채 안된 상황이었다.

첫날 우리 부대는 식사를 마친 후 곧 전남도청 부근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대대 주임상사, 보급병, 그리고 작전 선임하사와 나는 전남대 교정에 남아 대대 작전 상황일지를 정리했으며 아울러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발포에 사용된「경계용 실탄」을 관리했었다.      

공수 부대는 예나 지금이나 훈련시에는「對간첩작전용」또는「경계용」으로 실탄을 탄약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이 탄약상자는 대대본부에서 관리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훈련하는 공수부대의 대대본부에는 이 탄약상자가 있다. 그러나 대대본부에 보관한 것이지 개인에게 지급되는 일은 적어도 5월 20일까지는 없었다.

처음 병력이 투입된 당시에는 유일하게 대대장만 권총실탄을 가지고 투입되었고, 나머지 전 대원에게 지급된 장비는 실탄 없는 총, 대검, 70cm의 진압봉, 방독면, CS탄(최루탄) 2개 그리고 철모 앞에 내려쓰는 방석망이 전부였다. 이중 행보에 가장 불편을 주는 것이 바로 M-16과 방독면이었다. 그 당시 지급된 방독면은 오히려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시는 형편없는 저질 제품이었다.

전남대 교정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 P-77 무전기를 담당하던 나는 대대 작전 상황을 기록해 갔다. 내가 속한 3공수 12대대는 광주시청에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했다. 그날 오후 3시께까지의 상황은 그저 대치 상태였다. 이때 여단 본부를 통해 들은 당시 상황 분석은「초기 투입된 7공수단에서 매우 과잉진압을 했다. 공수부대에 대한 반감이 심하니 수습이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벌써 확대조짐의 불씨가 번져가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유언비어가 도시를 광기로 몰고 갔다


게다가「경상도 군인만 내려왔다」는 유언비어가 전 광주지역에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 외에「공수부대가 유부녀를 겁탈한다」느니「술을 먹거나 환각제를 맞았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사복경찰로부터 접수되기 시작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결국 상대방의 감정을 극한 상황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전라도 출신인 대대장은 지역감정을 악용한 유언비어를 보고 받고『경상도 출신 군인은 대열 후미에 배치시켜 광주시민을 자극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가까운 시위진압 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나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들으면서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리가 유부녀를 겁탈한다? 전시와 똑같은 상황에서 대열을 이탈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인데 어느 정신 나간 친구가 대열을 이탈할까. 특히 일개 중대가 장교 2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12명 단위에서 그러한 행위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그날 가장 과격한 시위가 벌어질 무렵 우리 부대원 대부분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급식차량이 시위대에 밀려 부대원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대원들에게 환각제나 술이 공급될 리 만무했다.        

무전을 듣고 상황일지에 기록하던 필자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지금 이 황당한 유언비어들은 아직도 활개치고 다닌다. 더구나 이런 내용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자신들도 광주사태의 영웅에 포함된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유언비어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 상황실에는 점점 과격한 상황으로 치닫는 보고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위대 수가 매우 불어나고 있다.
   -상대편은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했다.
   -투석으로 인한 경미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CS탄이 다 떨어졌다.
   -E-8 최루탄 발사통을 더 지원해 달라.
   -최소한의 자위방어를 해야겠다.

이런 보고들은 여단본부로 올라갔고 곧 이어 여단본부에서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저지선을 넘는 시위대에 한하여 자위 방어 개념으로 시위 진압작전을 개시하라』

  그러나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계속 상황보고가 흘러 나왔다.

   -모든 최루탄이 다 떨어졌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 대대가 담당한 지역의 시위대 수는 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모든 부대는 흩어지지 말고 집결하라.


                                                       5.20 밤, 정중사 차에 깔려 죽다


20일 오후 7시께 우리 12대대는 광주역에 있던 3공수 15대대를 지원하고 KBS 광주방송국을 보호하라는 여단장의 지시를 받았다. 우리 부대는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15대대와 합류했다.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우리 부대가 밀리는 상황을 계속 보고해 왔다. 악몽을 꾸는 듯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늘상 자부할 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시범을 보인 부대였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밀리고 있었다. 교신 내용은 매우 험악하게 변해갔다.  

   -차량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  

오후 8시께 차량돌진 사태가 연이어 접수됐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될 무렵 드디어 피해상황이 접수됐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16대대의 한 중사다.
   -우리 대대원도 차량에 깔려 부상당했다.

당시 차량에 깔려 사망한 군인은 정관철 중사(사망 후 상사로 특진됨)였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 하사관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부상병이 생겼다는 무전을 받은 지 20여 분이 지난 후 부상자들이 후송되어왔다. 그중 한 사람, 6지역대 장하사가 차량에 다리를 깔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당했다고 했다. 張하사의 말에 따르면 차량은 지그재그로 진압군을 향하여 마구 돌진해 왔고 이에 병사들은 겁을 먹고 피하기에 급급해 하다가 부상자가 속출하자 부대원 모두가 과격해졌다고 한다.

張하사와 함께 실려 온 두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화물트럭의 운전기사와 조수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경상도 차량이란 이유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옷도 찢겨지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렵 무전기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초급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옆 대대와 접촉이 안 되고 있다.
   -공포탄을 달라.
   -최소한도 차량을 저지할 수 있는 실탄을 달라.


                                               지그재그 차량돌지 작전에 드디어  실탄 지급


너무나도 다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미 최루탄도 떨어진 상황이며 진압봉으로의 대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약 20여 분이 지난 후 공포탄 및 실탄을 사용해도 좋다는 여단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단 유의할 점 몇 가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1)실탄은 중대장 급 이상에게만 30발씩 지급할 것(공수부대 1개 대대에는 4개 지역대에 4개 중대씩 16개 중대가 있었는데 이를 팀이라 부르며 팀장이 곧 중대장이며 대위급으로 편성되어 있다)

(2)돌진해 오는 차량의 저지용으로만 사용할 것

(3)인명을 향하여 절대로 쏘지 말 것

(4)공포용 이외의 용도에 사용할 시에는 엄중 처단한다.

대충 이런 요지와 함께 실탄지급을 명령하는 전통이 날아왔다. 작전병이었던 필자가 이 전통을 예하부대에 하달했으므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항들이다.

한편, 우리 대대에서는 소유하고 있던 탄약상자를 M-16 탄약 1상자와 예광탄 및 공포탄 각 1통씩을 싣고 여단 본부 병력과 함께 우리 대대의 작전 지역으로 수송했다.

우리 부대에서 지급된 실탄은 두 곳으로 나뉘어 전달됐다. 한 곳은 16대대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신안동 굴다리 쪽이었다. 본부대 병력 20여 명과 정보 참모가 경계용 실탄 1백여 발을 이들에게 전달했다. 여단 작전 참모와 함께 출발한 실탄 운반조는 광주역으로 향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와 부딪쳤다.

운반조는 시민군들의 공격을 뚫고 힘겹게 통로를 확보해 12, 15대대가 있던 광주역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3공수 11대대는 금남로 신탁은행 공터에서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던 중 여단장의「광주역 집결」이란 명령을 받고 최루탄을 발사하며 포위망을 뚫고 이동중이었다. 이들은 광주 시청에 몰려 있던 13대대와 합류한 다음 11시 30분께 가까스로 광주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조그마한 타이탄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선무 방송을 하며 돌아다니던 여자가 있었다(나는 훗날 이 여자의 이름이 전옥주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여자의 선무 방송내용은 내게 종합되어졌다. 그 내용은 이렇다.

   -광주 도청에서 시민 두 명이 살해되었다.
   -광주 시민이여 봉기하여 무자비한 공수부대원을 몰아내자.
   -광주역 부근에서 또 시민이 살해되었다.
   -저들은 우리를 향해 절대로 총을 쏘지 못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궐기하자 광주 시민이여.


                                                             중대장님, 전옥주를 죽입시다!


이 기록을 정리하는 사이 동료들의 얼굴 표정을 보니 전옥주란 여자의 선무 방송에 의해 대단히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선무공작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오히려 겁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대원들은「저 여자 때문에 더욱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니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당시 중대장이던 孫대위에게 한 하사관은「팀장이 못 쏘겠다면 총을 내게 달라. 내가 쏘아 죽이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 여자를 향해 사격한 군인들은 없었다.

우리가 속한 부대는 북한의 한 지역을 대상으로 늘상 훈련을 한다. 그곳에 침투해 선무공작을 하고 때로는 시위를 일으키며 선무방송과 삐라를 만들어 뿌리는 임무도 수행한다. 한마디로 비정규전을 하는 부대이다. 그런데 선무방송하는 시민군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당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광주사태는 시민군과 대한민국 육군과의 비정규전이었다. 거기서 비정규전 전문가인 군인들이 아마추어인 시민군들에게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5월 20일 3공수여단의 광주 첫날 상황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아침에 광주역에 도착했을 때 누구 하나 이런 사태가 올 줄 몰랐다. 모두가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듯했다. 우리 부대는 광주역에 집결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다가 5월 21일 02시께 KBS를 지키던 31사단 경계병력들과 사복 경찰관 4~5명과 함께 전남대로 철수했다.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 직후 광주 KBS 방송국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날 광주역에서의 진압을 두고 지금까지「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필자는 유감이다. 당시로서는 민간이 얼마나 총으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학살」이거나「무차별 사격」이었다면 적어도 수십 내지 수백 명이 죽거나 총상을 입었어야 말이 된다. 그 날 내 동료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들은 사람을 향해 쏜 것이 아니라 위협용 사격을 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95년 7월에 발표된 검찰 조사에서도 이 날 밤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4명이었고 부상자가 6명이었다. 3공수여단 하사관 1명이 차량에 깔려 사망했고 3명이나 부상당한 이후 총을 가진 군인들이 작심하고 사격했다면 왜 4명에 국한됐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살인자로 몰려야 하는 이유를 필자는 모르겠다.

혹자는 광주사태의 진압을 일반 보병부대에 맡기지 않았음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처럼 자제할 수 있었을지 필자는 의심스럽다. 눈에 불이 튀는 상황에서도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았기에 4명만이 불행한 죽음을 겪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 다른 입장에 설 수 있다고 본다. 우리라고 자원해서 진압군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시민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진압자체를 두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시각은 진정 유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차온다!” 노이로제


한편, 이날 현지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죽음 앞에 직면한 부대원들이 전남대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車 온다』는 소리였다. 예측할 수 없는 지그재그식 운전으로 돌진해 오는 차량 앞에, 서 본 사람만이 체감할 이 공포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부 짓궂은 하사관이 녹초가 되어 바닥에 퍼져 있는 동료들에게『車 온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한 명도 예외 없이 잠에서 깨어나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몸을 날리며 긴장했다. 우스개로 한 장난은 동료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듣는 것으로 끝났다.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정반대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車 온다』는 경고에 사력을 다해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시위대의 차량급습으로부터 피해 다니다 돌아온 그들에게「차량 돌진」은 일종의 노이로제가 되어 있었다.

5월 21일 새벽에 우리는 일부 경계병력을 제외하곤 강의실에서 눈을 붙였다. 새벽 5시께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시민들이 끌고 온 소방차였다. 전남대학교를 에워 싼 그들의 모습은 우리를 곧 삼켜버릴 것 같은 성난 모습이었다.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민군 측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시민군도 무장했다는 전통과 함께 전대대원에게 실탄 10발씩 지급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부대 내에 남아 있던 탄약상자들이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은 소총으로 무장한 채 군용 지프차를 몰고 태극기를 흔들며 정문 앞까지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은 복면을 하고 어깨 위에 총을 세운 채 하늘로 공포를 쏘고 다녔다. 그들도 우리를 향해 함부로 사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총이 카빈이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됐다.

이때 처음 일반 대대원에게까지 실탄이 지급되었으며 이는 곧 상대편에 대하여 사격도 가능하다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멀리 대치?
출처 : 호수가의 벤치
글쓴이 : 愚松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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