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일본의 역사를 읽어보세요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1. 14. 12:55
일본에 처음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일본이 아직 대륙에 붙어 있었을 때 서쪽의 한국과 북쪽의 시베리아부터 건너와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
채집 등의 생활을 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또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온 사람들도 일본인들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AD 300년에 이르러 해를 숭배하던 야마토 왕국이 정복과 연합을 통해 일본을 느슨하게나마 통일하였다. 불교는 중국에서 소개된 6세기 중반 이후 곧 국교가 되었으며 불교와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인 신도가 융합되어 신도의 신들이 석가모니의 재현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9세기에 토착민인 아이누 족을 정복한 이후 다소 왕국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왕들은 더 많은 시간을 정치보다 오락과 학문적인 일에 쏟게 된다. 중요한 궁정 요직은 타락한 귀족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이 거의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지방에서는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의 힘이 새로운 실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벌써부터 영주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력을 갖추고 수도 헤이안(현재의 교토)에힘을 뻗치기 시작했다. 타이라 일족의 난으로 후지와라 가문의 힘이 약화되고 이후 다시 1185년에 미나모토 가문이 들어서게 되었다.

쇼군(군사상의 지도자)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수도를 가마쿠라에 정하게 된다. 그러나 일왕은 형식상의 지배자로서 교토에 남아 있었다. 이것이 1868년 왕가가 정치적인 힘을 되찾게 되기까지 긴 세월을 거쳐 여러 사무라이 가문들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봉건제의 시작이 되었다.일본의 봉건시대는 크게 다섯 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3) 당시는 계속해서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몽고 군의 침략을 받았다. 몽고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약해진 지도력은 무사계급의 지지를 잃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1333-1576) 초기에는 고다이고 왕이 직접 통치하였으나 불만을 품은 무사 아시카와가 이끄는 반란에 의해 고다이고 왕은 요시노의 산중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아시카와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한 시대는 점점 통치력을 상실해 가면서 일본은 내전과 혼란의 도가니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었다.

잘게 나뉘어진 일본을 평정하고 다시 통일한 것이 노부나가이며 그의 모모야마 시대(1576-1600)의 후계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기독교인 시대(1543-1640) 동안에는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용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주제넘게 간섭하는 위험한 종교로 여겨지면서 잔인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1600-1867)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젊은 후계자를 쳐부수고 수도를 에도(현재의 도쿄)로 천도하였다. 일왕은 계속해서 교토에 머물며 지극히 형식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으나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을 쇄국 정책의 시대로 몰고갔다. 당시의 모든 일본인은 나라 밖으로의 여행이나 교역이 금지되고 외국인들은 엄격한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의 규율을 요구하던 이때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다.1

9세기로 넘어오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침체되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외국 상선이 점점 집요하게 고립된 일본을 조사하러 오기 시작했고 기근과 가난으로 인해 정권의 지지기반도 약화되었다. 1867년쇼군 케이키가 물러나면서 메이지 일왕이 내정을 관할하는 지배권을 되찾게 되었고 이때부터 급속히 서구화와 산업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1889년에 일본은 서양식 정체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 때의 신조는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돌아가 민족주의 의식을 싹트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자신감을 북돋게 된 결정적 사건은 청일 전쟁(1894-5)과 노일 전쟁(1904-5)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꺾으면서부터이다. 메이지 왕의 아들 요시히토의 지배하에서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 참전은 전쟁의 피해는 크게 입지 않은 채, 선적과 교역을 통해 경제를 놀랍도록 빠르게발전시키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었다. 뒤 이어 히로히토가 1926년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민족주의의거센 물결은 1930년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불안은 빠르게 군국주의자들이 실권을 잡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일본은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고 미국과 중립 조약을 맺으려는 외교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곧이어 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빠른 승리를 계속하면서 인디아 너머까지 전선이 확대되고 호주 근방과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국의 역공격은 일본 해군의 우위에 종지부를 찍고 전세를 일본에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결국 1945년 8월, 모든 전선에서 몰리는 지경에 이르면서 소련의 참전까지 겹치게 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다.히로히토 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연합군은 일본의 무장해제와 일왕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1952년까지 일본을 점령했다. 이후 여러 재건 정책으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수출 경제 국가가 되었고 거대한 무역 수지를 낳으며 전기, 로봇, 컴퓨터, 자동차 산업, 그리고 금융업 같은 분야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1990년대에 들어와 낡은 확신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전설적인 일본의 경제 성장은 눈에 띄게 정체를 거듭하고 있고, 1993년에는 38년만에 처음으로 보수적인 자민당이 쏟아져 나오는 추문으로 인해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었다(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여당자리를 되찾았다).


1995년 1월 거대한 지진이 고베를 강타했다. 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우왕좌왕하였고 일본이 그렇게 자랑하던 만반의 지진 준비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두 달 뒤에는 세기말 최후의 날을 꿈꾸는 컬트 종교집단 옴진리교에 의해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를 터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변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국제 시장에서나 현명한 유권자들은 한때 당연한 듯이 행해지던 정치 뇌물이나 기업과 정부의 뒷거래에 대해 이제는 엄격하게 대응하고 있다. 교착 상태의 경제나 일본 은행들의 거대한 손실, 주가 하락 그리고 지역 불안 등은 일본이라는 기업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1998년 초 일본 은행의 상황이 너무 악화되어 미국 정부에 의해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일본 경제 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은 1998년 중반 여당 자민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결국 하시모토 수상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뒤를 이어 자민당 중진 케이조 오부치가 수상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별로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예측하고 있다. 그는 2000년 봄에 과로로 순직했다.
출처 : 국제방
글쓴이 : 가을 단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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