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인왕산의 결투, 국운을 건 한판승부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1. 25. 22:22
인왕산의 결투, 국운을 건 한판승부(1)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 인왕산
ⓒ2005 이정근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나 사활을 건 결투가 있었다. 그것이 개인의 이해타산을 위한 결투라면 한 두 사람의 핏빛 희생으로 마감할 수 있지만 국가의 명운을 건 대결에서는 승자의 반대편 즉, 패자 그룹에 줄서기 한 자들은 몰락하게 된다.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그렇고 그 중심부에는 진보와 보수라는 집단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태풍의 눈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태풍의 눈은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움직인다. 그것이 역사의 발전이다.

흔히 우리가 결투라 하면 중세 유럽 귀족들의 결투나 OK목장의 결투를 떠올린다. 하지만 OK목장의 결투는 싸움일 뿐 결투가 아니다. 소 몇 마리 또는 몇 헥타르의 땅을 빼앗기 위하여 총을 뽑아 든 그들은 물욕에 눈이 어두운 저급한 싸움꾼일 뿐이다. 중세 기사 역시 그렇다. 그들이 칼을 뽑아든 명분이 개인의 명예나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소인배들의 싸움이다.

그들의 싸움과 달리 진정한 의미의 결투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재물을 염두에 둔 싸움이나 가문의 명예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다. 조국의 국운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인들처럼 무기를 들고 상대의 목숨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말로 싸운 것이다. 심판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였다. 말로 싸우는 것이 무기로 싸우는 것보다 어렵다. 논리에서 밀리면 지기 때문이다.

▲ 인왕산 정상
ⓒ2005 이정근
지금으로부터 611년 전. 인왕산 능선에서 신생국 조선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주인공은 진보그룹의 기수 정도전과 보수의 간판급 선수 무학대사였다. 승패는 분명히 갈렸다.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어차피 이 기사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니까 결과를 먼저 말하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정도전의 통쾌한 뒤집기 한판승이었다.

정도전이 누구인가?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나 약관 28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였으나 기득권자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유배와 처형 위기를 겪었다. 귀양에서 풀리자 삼각산에 초막을 치고 호를 삼봉(三峰)이라 고쳐 지으며 절치부심 칼을 갈았다. 때마침 위화도 회군 이후 함흥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일 때다. 이때부터 그는 갈고 닦은 웅지를 펼치던 신진 사류였다.

무학대사 또한 만만치 않다. 무너지는 집에 깔리는 악몽에 시달리던 장군 이성계가 수도정진하던 안변 토굴로 찾아왔을 때 "서까래에 깔리는 꿈은 임금 왕(王)자에 깔리는 꿈으로서 일생일대의 길몽이니 천기를 누설하지 마시오"라는 해몽으로 일약 왕사(王師)에 오른 승려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을 명당에 이장케 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한 숨은 공로자였다. 학문도 깊어 만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선승(禪僧)이었다.

▲ 인왕산 해골바위
ⓒ2005 이정근
부패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의 왕으로 등극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황궁 수창궁에 기거하며 신생 왕국의 정사를 돌보고 있었지만 하루 빨리 개성을 떠나고 싶어 했다. 송악산 아래 개경 땅이 도읍으로서의 지력(地力)이 다했다는 설도 한몫 했지만 최영 장군을 처형하던 날 동맹 철시하던 개경인들의 저주의 눈빛이 두려웠고 정몽주를 흠모하는 개성인들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계에게 두문동 사건은 충격이었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혁명세력은 고려에 충성하는 기득권과 신생국 조선왕조에 반감을 품고 있는 잔존세력 회유에 들어갔다. 이 작전에 선정된 인물은 신규, 조의생, 임선미 등 성품이 강직하고 기골이 대쪽같은 고려의 선비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엄포와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이성계, 두문동 사건에 충격 받아 조급해져
조선왕조에 참여하면 응분의 직책을 주고 신분을 보장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허사였다. 혁명세력은 나오면 살려준다는 최후통첩과 함께 이들이 은거하고 있던 광덕산 두문동 골짜기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불타는 화염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72명이나 된다. 이렇게 참혹한 사건이 있은 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두문동 사건에 충격 받은 이성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천도를 서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혁명에 성공한 개국공신들은 눈앞에 보이는 공록배분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포스트 이성계를 노리는 야심가들은 세력 확장에 열중하느라 천도는 안중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천도는 이성계의 나 홀로 사랑이고 한양천도는 이성계의 짝사랑이었다. 오로지 혼자 추진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 한양천도 당시 쌓았던 성벽
ⓒ2005 이정근
한양천도를 최초로 구체화한 것은 이성계다. 노국공주를 받아들이며 원나라의 100년 지배에 시달리던 공민왕이 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한양천도를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한 일도 있었지만 고려 패망과 함께 무위로 돌아갔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 개국과 함께 한양 천도계획을 진행하다가 시중 배극렴의 주청에 의하여 계획을 접었던 일도 있다.

그 후, 천도 후보지로 등장한 곳이 충청도 계룡산이다. 계룡산이 새 도읍지로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태조 2년(1393년) 1월 2일, 왕가의 태실지(胎室地)를 관장하던 태실고증사(胎室考證使) 권중화에 의해서였다. 학문이 깊고 풍수지리에 통달한 권중화의 헌상은 지체없이 진행되었다.

계룡산 천도공사 10개월 만에 중단
권중화의 주청이 올라온 한 달 후 2월. 차가운 날씨를 무릅쓰고 계룡산을 답사한 이성계는 즉시 공사에 착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부터 10개월 후. 개국공신에 책록된 좌도(경기도)관찰사 하륜이 천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계룡산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아 수도로서 부적합하고 금강 이남은 배역의 땅으로 천년 사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천도공사가 중단되었다.

계룡산 천도공사를 중단시킨 하륜이 내놓은 대안은 무악이었다. 오늘날 신촌지역과 연희동과 동교동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도참설에 능한 하륜이 천거 이유로 손꼽는 것은 물길이 좋다는 이유였다. 조정에 바치는 세곡을 나르는 조운선이 닻을 내리는 양화진은 모두가 긍정하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1394년 8월 11일, 이성계는 풍수를 담당하는 관청인 서운관 관리를 대동하고 즉시 현장 시찰에 나섰다.

▲ 서울 성곽. 한양천도 당시 쌓았던 성곽이 원형으로 보존되어있습니다
ⓒ2005 이정근
무악산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산세를 살펴보던 이성계에게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무악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여 육로나 수로 교통이 편리하지만 궁궐과 관아, 그리고 시전 등 도읍의 기반시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비좁아 적합하지 않다"란 의견을 내놓으며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새 도읍지를 정하여 하루 빨리 송악산 아래 개성을 떠나고 싶은 군주의 심중을 읽지 못한 신하의 주청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통수권자의 심중을 헤아리는 것이 유능한 신하의 덕목일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심중을 외면한 채 진언하는 것이 충(忠)일까? 유한우의 반대에 심기가 불편해진 이성계가 마침내 화를 터트렸다. 아래에 나오는 대화는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여기에 옮겨본다.

▲ 인왕산 범바위
ⓒ2005 이정근
"자네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되뇌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어느 곳이 가하냐?"
그러자 서운관 관리 유한우도 물러서지 않고 풍수지리에 통달한 풍수가답게 논리를 펼쳤다.

"고려가 망한 것은 송악의 지덕이 쇠한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왕이 명당을 버리고 자주 다른 궁으로 옮아 지냈던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냥 송악에 새로 궁궐을 짓고 계속 도읍으로 삼는 편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이성계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선언했다.

"나, 국왕이 천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누가 감히 이에 반기를 든단 말인가. 가까운 곳에 길지가 없으면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가 도읍했던 곳이라도 갈 터이니 그리 알고 의논하여 아뢰어라."

이성계의 천도의지는 강했다. 누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천도는 이성계의 신념이었다. 새로운 도읍지가 어디여야 한다는 것은 차후 문제였다. 우선 개성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원나라 간섭을 지배로 의식하지 못한 고려 관료출신 관리들은 개성에 눌러앉기를 원했고 고려의 부패에 일조했던 기득권층의 저항은 집요했다.

▲ 경복궁 경회루
ⓒ2005 이정근
1394년 8월.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부패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의 왕으로 등극한 지 3년차 되던 해였다. 무악을 답사했지만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한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과 수행하고자 하는 신하들을 뿌리치고 천도 후보지로 거론되는 한양 땅 인왕산 시찰 길에 나섰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당연 참석했다.

이성계의 복안은 절묘했다. 말 많은 신하들을 참여시키면 갑론을박 결론이 나지 않을 터, 보수의 간판급 주자 무학대사와 진보의 기수 정도전을 일대일로 대결시켜 결론을 종결짓고 후폭풍을 잠재우고자 하려는 계략이었다. 이에 응하는 정도전 역시 치밀한 사전 준비와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출처 : 블로그 >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 | 글쓴이 : 붉은 노을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