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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1971년에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7년에 한국문인협회 회장직에 올라 대한민국에서 문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또 1천여 편에 달하는 시를 지어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들었던 그에겐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니, '부족방언의 마술사'니, '단군이래 최대 시인'이니 하는 극찬 일색의 평들이 뒤따랐다. 후배 문인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노벨상 후보 추천을 5차례나 받은 것에서 더 나아가 그가 죽은 지 반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중앙일보에서는 그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면서 미당을 이 나라의 민족시인 혹은 국민시인으로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의 친일행적이나 친독재 행적은 그가 가진 한 두 가지 인간적인 흠으로 평가 절하되었고, 이것으로 그의 문학을 폄하할 수는 없다고 말해져 왔다. 그러나 과연 미당의 친일·친독재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폄하할 수 없을 만한 일이고, 더 나아가 그는 '단군 이래 최대 시인'으로서 이 나라의 민족시인 혹은 국민시인으로 칭송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의 친일·친독재 행적과 문학세계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1933년 시 「그 어머니의 부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선 미당 서정주는 1942년 7월 평론 「시의 이야기」를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쓰게 되었다. 특히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하였는데, 그가 쓴 친일작품은 시뿐만 아니라 평론, 수필, 단편소설, 르포 등 11편에 이른다. 이들의 주 내용은 태평양전쟁을 일본인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친일에서 친독재로 해방이 되고 문단에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서정주는 주저없이 우익쪽을 선택했다. 그는 우익진영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1946.4)의 결성을 주도하여 시분과 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극우반공적인 친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서정주는 조직이나 정치적 배경 등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이승만의 영향력을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시킬 목적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시작한다. 약 2년의 공력을 들인 이 전기는 출간되자마자 이승만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미당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보에 힘입어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의 지위에 오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당은 대전 일대에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결성에 앞장서서 후방의 선무활동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고, 전쟁이 끝난 1954년 봄에 선거를 거쳐 대한민국 예술원 초대 회원으로 뽑혔지만 선거결과를 둘러싼 잡음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 후 서정주는 1960년 4·19혁명 시기엔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다가 1961년 5월 군부 쿠테타 이후에는 박정희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서정주 대신 박목월(朴木月)을 선택하면서 그는 뒤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정주는 문단 지도자로서 1966년 광복절을 맞아 "새로 나갈 길은/하늘에서도 땅에서도/베트남뿐이다/베트남뿐이다"의 「다시 비정의 산하에」라는 시를 발표하여 월남전 참전을 앞장서서 고무 찬양하면서 일제 말기처럼 이 땅의 젊은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들을 학살하고 권자에 오른 전두환과 밀착하여 광주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공인하고, 그 처연한 시민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짓거리로 규탄하는 한편 전두환 후보를 위한 텔레비젼 연설에 얼굴을 드러내면서 군부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1987년 전두환의 56세 생일을 맞아 축시 「처음으로」를 발표하여 그를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으로 미화, 찬양하기도 하였다. 서정주는 이러한 공로로 5공화국 때는 국보위 위원에까지 올랐다. 또한 1986년에는 광주민중항쟁 이후 불의한 현실에 항거하며 활동했던 '민중문학'에 맞서기 위해 독재정권으로부터 얻은 자금으로 『문학정신』을 창간하여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우익세력을 대변하였다. 또한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 초여름엔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에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산 바 있었다. 이처럼 외세의 지배와 친미적인 극우반공의 국가건설 및 군부독재 정권 수립과정에서 서정주는 한결같이 외세에 대한 저항과 민중적인 지향이 아닌 친일과 극우반공의 친독재적 행적을 걸었다. 그에게는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의식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국화꽃'에 숨겨진 이미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그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지닌 예술성은 그가 가진 모든 삶의 허물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진정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인가. 서정주의 진정한 문학적 면모를 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1946-7년경에 쓰여져 국민적 애송시 1호로 꼽히는 「국화 옆에서」를 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이 생긴 꽃"의 시구를 통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거쳐 관조의 경지에 다다른 중년 여인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해석은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스런 흔적을 없었던 것으로 지우고, 일본어를 '국어'로 생각하며 성장한 서정주의 삶을 백지화한 채 '국화꽃'을 한국적 의미로만, 또는 시속의 직유적 표현에만 의존해 해석한 것이다. 사실상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은 현실속의 국화꽃이나 한국 전통예술속의 국화꽃처럼 '여러 송이'를 지닌 꽃이 아니라 일본왕실을 나타내는 황국(黃菊)의 문장(紋章)처럼 '한 송이의 꽃'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5년에 태어난 서정주는 서른 한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의 친일작품은 시, 소설, 평론, 수필, 르포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할 정도로 다양했고, 또 그 내용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의 천황'은 그 외형만 바꾼 채 지속되었다. 즉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은 창작의 초기에 모델이 된 어느 인물의 이미지와 이승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큼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서정주의 『신라초』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등장하는 '단군', '웅녀', '세오녀', '사소' 등은 『삼국유사』내지 『삼국사기』를 소재로 삼아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느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들은 오히려 '민족주의의 옷을 입은 친일의 또 다른 변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서정주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앞장서서 협력했던 극우반공의 군사정권하에서 일방적으로 밝은 한 면만을,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앞으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백성의 멘탈리티, 종의 멘탈리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이조 사람들이 그들의 백자에다 하늘을 담아 배우듯이 하늘의 그 무한포용을 배우고 살려 했을 뿐"이라고 미화하고, "지상이 풍겨 올리는 온갖 미추(美醜)를 하늘이 '괜찮다'고 다 받아들이듯 그렇게 체념하고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변명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친일파' 내지 '부일(附日)파'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스스로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칭하였다. 이는 스스로의 친일행위를 '하늘'의 뜻을 따른 것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서정주의 독특한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서정주는 일제시대에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히로히토 천황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떠받들어 섬겼듯이, 해방 이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을 섬기고 따랐다. 미당은 이승만을 만나기도 전부터 그를 "하늘의 서자 환웅의 아드님-단군"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당의 '하늘'내지 '주군'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이승만에게만 보내진 것만이 아니었다. 1987년에 쓴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란 시에서 미당은 전두환에 대해 '새로운 햇빛'과 '하늘의 찬양'이란 거창한 표현을 쓰면서 마치 그가 단군이나 아마테라스에 필적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나 하듯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으로 찬양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통찰력과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과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 주인을 섬기는'종의 멘탈리티'만을 보였던 것이다. 과연 추악한 삶에서 아름다운 예술이 나올 수 있는가. 김지하는 어느 대담에서 "미당의 시는 아름답기는 하나 참소름이 끼칠 정도로 눈물이 나고 가슴이 떨리는 감동은 없다"면서 그의 문학에 대해 간결하게 논평하였다. 미당이 죽은 지 반년 남짓한 시점에 그에겐 민족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 땅의 평론가들과 언론은 서둘러 졸속으로 「미당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가장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 민족과 민중들의 진솔한 삶을 외면하고, 민중들의 의식에 '피해의식의 합리화'와 '체념' 내지 '숙명의식'을 갖도록 한 그가 과연 우리가 문학적으로 기릴만한 인물이며, 더 나아가서 이 땅의 민족시인과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김소남(연세대 박사과정, 현대사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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