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주는 뭐고 공주는 뭘까요? | |
|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 의정궁주 |
폐주였기에 역사의 뒤안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폐왕이었기에 능이 아니라 묘라는 이름 아래 지하에 묻혀있던 연산군이다.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의문의 병사한 연산은 사망 7년 후 이곳 방학동으로 이장해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묘아래 마을은 800여 년 전부터 파평 윤씨 자자일촌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그것은 830년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 은행나무와 동네입구 원당천(泉)이 증명하고 있다. 예전부터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이 가까이 있었으나 개구쟁이 아이들도 피했고 무서워서 안 가던 곳이다. 이러한 연산군 묘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이 비공개로 관리해왔으며 이번에 전면 개방하기에 이른 것이다. 500여년 가까이 초야에 묻혀있던 연산군 묘가 이제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의정궁주 조씨, 그리고 딸과 사위가 묻혀 있다. 여기에서 연산군 묘 공개 못지 않게 의정궁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궁주(宮主)가 뭘까? 혹시 공주(公主)의 오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궁주가 맞다. 틀림없는 궁주다. 비석에도 궁주라 새겨져 있고 안내 책자에도 궁주라 인쇄되어 있다. 따라서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는 연산군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궁주, 공주, 옹주 모두 여자에게 주어지는 작호이지만 공주와 옹주는 슬하의 여자이고 궁주는 살을 섞은 여자이다. 궁주는 '왕의 남자'가 아니라 왕의 여자를 말하며 왕의 여자에게 내리는 작호이다.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따랐다. 내명부(內命婦)는 고려조의 영향을 받아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으로 봉해졌다. 이렇게 시행하다보니 왕의 딸도 궁주, 왕과 잠자리를 같이한 왕의 여자도 궁주라는 혼란이 왔다. 실례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누이가 정선궁주, 경선궁주, 경안궁주, 정선궁주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여자도 의정궁주라 불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세종시대 정비한 제도로 인하여 단종 이후에 나타나지 않은 궁주라는 작호가 연산군 묘역에 나타난 것이다. 연산군 제 2 부인 조씨 묘비 석에 궁주라 새겨져 있고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안내책자에도 의정궁주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세종조 이후 연산군 부인에게 궁주라는 작호가 붙어있으니 이해하기 어렵다. 실록에는 없는데 비석에 있고 공식 책자에도 있다. 이것이 실제와 역사의 괴리현상일까? 이점은 문화재청에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들이 연산군 폐위 후 유배 가던 날(중종1년 9월 5일). 나이 어린 조카들이 안타까워 중종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리니 가마에 태워 보내면 어떨까?"라고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반정군 세력의 신하들은 "죄인은 가마를 탈 수 없습니다. 가마를 타고 가지 못한다면 들것으로 들고 가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중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연산군 슬하의 딸이 능성 구씨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사위가 구문경이다. 따라서 연산군이 누워있는 묘역은 능성 구씨 선영이다. 연산은 사돈네 선영에 묻혀있는 셈이다.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그리고 둘째부인 의정궁주, 그리고 딸과 사위 구문경의 묘가 있다. |
왕은 왕이었으나 쫓겨난 왕이었기에 왕릉이라 불리지 못하고 도봉산 자락 후미진 곳에 누워있던 연산군. 비록 왕자의 예를 갖추었다 하나 초라한 묘. 돌보는 이 없이 백성들의 관심밖에 머물러있던 연산이다. 궐위에서 퇴위된 연산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고 장사 7년 후 이곳 방학동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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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찾는 이 없어 이끼가 끼어있던 개방되기 전 진입로, 지금은 진입로를 새로이 개설했다 |
| ⓒ 이정근 |
그의 사후 7년 되던 해, 연산군과 함께 중전에서 거창 신씨로 강등된 부인 신씨가 시동생 중종에게 이장을 간청했다. 강화도 교동에 묻혀있는 연산을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 능성 구씨 묘역으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중종이 가납하여 이곳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93년을 이곳에 누워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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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군 묘역아래에서 연산군 묘를 지켜보고 있는 수령 830년 은행나무. 권력의 영욕과 권세의 무상함을 알고 있을까? |
| ⓒ 이정근 |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 있다. 그를 퇴출시킨 반정세력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연산군일기>는 그의 실정이 부각되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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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조망에 갇혀있던 개방되기 전 묘비석. 지금은 입구 쪽 양지로 나와 있다 |
| ⓒ 이정근 |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 반정군 아류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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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공주 묘 |
| ⓒ 이정근 |
출처 : Time Box
글쓴이 : 풍경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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