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연산군 묘, 11일 부터 시민에게 공개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7. 22. 20:59

 

궁주는 뭐고 공주는 뭘까요?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 의정궁주

 

▲ 일반 시민에게 전면 개방된 연산군 묘역.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신씨 묘다. 왕릉이 아니기에 정자각이 없고 향로석이 있다
ⓒ 이정근
연산군 묘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에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하다. 학술연구와 취재, 그리고 특별관람 신청자에 한하여 공개하던 연산군 묘가 7월 11일부터 일반 시민에게 전면 공개되었다. 우리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을 끌어 모았던 <왕의 남자> 때문에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절대 권력자 임금에서 군으로 강등되었던 연산이기에 국민들의 호기심을 유발한 것이다.

폐주였기에 역사의 뒤안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폐왕이었기에 능이 아니라 묘라는 이름 아래 지하에 묻혀있던 연산군이다.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의문의 병사한 연산은 사망 7년 후 이곳 방학동으로 이장해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 연산군 묘역에 있는 문인석.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한 표정이다
ⓒ 이정근
도봉산 자락 방학동 골짜기 잡초에 묻혀있던 연산군 묘는 봉분이 훼손되고 망주석과 문인석은 쓰러져 있었으며 비석의 글씨는 뭉개져 있었다고 연로한 노인들은 증언한다. 한 마디로 폐허나 다름없었다. 80년대까지 그랬다.

묘아래 마을은 800여 년 전부터 파평 윤씨 자자일촌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그것은 830년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 은행나무와 동네입구 원당천(泉)이 증명하고 있다. 예전부터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이 가까이 있었으나 개구쟁이 아이들도 피했고 무서워서 안 가던 곳이다.

이러한 연산군 묘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이 비공개로 관리해왔으며 이번에 전면 개방하기에 이른 것이다. 500여년 가까이 초야에 묻혀있던 연산군 묘가 이제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 창덕궁 옥류천의 비경. 흐르는 물에 왕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잔이 닿은 신하는 시를 읊어야했던 ‘유상곡수연’이 펼쳐졌던 곳이며 장희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배어있는 곳이다. 바위에는 ‘옥류천‘이라는 숙종의 시가 새겨져 있다.
ⓒ 이정근
문화재청은 2004년 5월 창덕궁 옥류천을 공개하여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최고통수권자의 경호 때문이라는 외형적인 이유와 권력자의 의중 살피기에 급급하여 공개를 꺼려왔던 서울성곽 숙정문도 개방했다. 폐주 연산군 묘도 공개했다. 보존과 보호에 치우쳐 일반 공개를 망설이던 우리의 문화재를 되도록 많이 개방하고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번에 공개된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의정궁주 조씨, 그리고 딸과 사위가 묻혀 있다. 여기에서 연산군 묘 공개 못지 않게 의정궁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궁주(宮主)가 뭘까? 혹시 공주(公主)의 오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궁주가 맞다. 틀림없는 궁주다. 비석에도 궁주라 새겨져 있고 안내 책자에도 궁주라 인쇄되어 있다.

따라서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는 연산군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궁주, 공주, 옹주 모두 여자에게 주어지는 작호이지만 공주와 옹주는 슬하의 여자이고 궁주는 살을 섞은 여자이다. 궁주는 '왕의 남자'가 아니라 왕의 여자를 말하며 왕의 여자에게 내리는 작호이다.

▲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종의 형제와 누이들의 기록
ⓒ 이정근
왕의 여자에게도 계급이 있었다. 왕비는 왕과 동격이므로 무품(無品)이다. 빈(嬪)은 왕의 1위 부실(副室)로 정1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빈이 왕비로 책봉되면 자동으로 품계는 없어졌다.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까지 모두 왕의 후궁들이다. 이 모든 것이 경국대전에 나와 있지만 궁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따랐다. 내명부(內命婦)는 고려조의 영향을 받아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으로 봉해졌다. 이렇게 시행하다보니 왕의 딸도 궁주, 왕과 잠자리를 같이한 왕의 여자도 궁주라는 혼란이 왔다. 실례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누이가 정선궁주, 경선궁주, 경안궁주, 정선궁주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여자도 의정궁주라 불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 경운궁(덕수궁)에 세워져있는 세종대왕 동상
ⓒ 이정근
조선이 어떠한 국가인가? 예를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가 아닌가. 세종 4년 2월 16일 이조(吏曹)에서 계가 올라왔다. 왕녀를 공주라 칭하여 내직과 구별하자는 안이었다. 이를 세종이 가납하여 대대적인 제도정비에 들어갔다. 예(禮)에 어긋나고 혼란스러웠던 작호를 국가 이념과 유교에 맞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세종시대 정비한 제도로 인하여 단종 이후에 나타나지 않은 궁주라는 작호가 연산군 묘역에 나타난 것이다. 연산군 제 2 부인 조씨 묘비 석에 궁주라 새겨져 있고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안내책자에도 의정궁주라 기록되어 있다.

▲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궁주에 대한 기록
ⓒ 이정근
왕의 딸로서 궁주라는 작호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 조에 많이 등장하지만 왕의 여자로서 궁주라는 작호는 <연산군일기>에 기록이 없다. 독자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만하다. 열심히 공부한 역사책에는 등장하지 않은 생경한 호칭이다. 역사에서 사라진 작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조 이후 연산군 부인에게 궁주라는 작호가 붙어있으니 이해하기 어렵다. 실록에는 없는데 비석에 있고 공식 책자에도 있다. 이것이 실제와 역사의 괴리현상일까? 이점은 문화재청에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 묘. 비석에는 궁주라는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 이정근
연산군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다. 슬하에 각각 2남 1녀씩 총 4남 2녀를 두었다. 정부인 거창 신씨에서 큰아들 이황(폐세자)과 둘째아들 창녕대군을 두었으며 둘째부인 의정궁주에게서 양평군 이인과 돈수를 낳았다.

이들이 연산군 폐위 후 유배 가던 날(중종1년 9월 5일). 나이 어린 조카들이 안타까워 중종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리니 가마에 태워 보내면 어떨까?"라고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반정군 세력의 신하들은 "죄인은 가마를 탈 수 없습니다. 가마를 타고 가지 못한다면 들것으로 들고 가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중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 일반 공개와 함께 양지로 나온 연산군 묘비석
ⓒ 이정근
아들 네 명 모두 연산군 폐위 후 중종1년(1506년) 9월 24일 사사(賜死)되었다. 이 또한 중종의 뜻이 아니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차후에 있을 수도 있는 싹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들의 처단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황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라고 중종이 버티었으나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왕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연산군 슬하의 딸이 능성 구씨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사위가 구문경이다. 따라서 연산군이 누워있는 묘역은 능성 구씨 선영이다. 연산은 사돈네 선영에 묻혀있는 셈이다.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그리고 둘째부인 의정궁주, 그리고 딸과 사위 구문경의 묘가 있다.

 

 

연산군 묘역은 연산군과 부인 거창신씨 묘. 의정궁주 조씨 묘가 있으며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있다. 임금이었으나 권좌에서 퇴출된 폐주였기에 왕자에 준하는 묘제로 안장되어 있다. 망주석과 문인석은 있으나 왕릉에 있는 석호, 석양, 무인석이 없으며 정자각과 홍살문이 없다.

왕은 왕이었으나 쫓겨난 왕이었기에 왕릉이라 불리지 못하고 도봉산 자락 후미진 곳에 누워있던 연산군. 비록 왕자의 예를 갖추었다 하나 초라한 묘. 돌보는 이 없이 백성들의 관심밖에 머물러있던 연산이다. 궐위에서 퇴위된 연산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고 장사 7년 후 이곳 방학동으로 이장하였다.

▲ 찾는 이 없어 이끼가 끼어있던 개방되기 전 진입로, 지금은 진입로를 새로이 개설했다
ⓒ 이정근
1506년 9월. 즉위 12년 만에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난 연산은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두어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역사책에는 두어 달이라는 애매모호한 낱말이 쓰이지 않는 법인데 <연산군일기>에는 분명하게 두어 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그의 사망 날짜마저 불분명하고 기록은 병사라 되어있지만 자연사인지 독살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31세 젊은 장정이 위리안치 2개월여 만에 시신으로 변했다.

그의 사후 7년 되던 해, 연산군과 함께 중전에서 거창 신씨로 강등된 부인 신씨가 시동생 중종에게 이장을 간청했다. 강화도 교동에 묻혀있는 연산을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 능성 구씨 묘역으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중종이 가납하여 이곳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93년을 이곳에 누워있는 셈이다.

▲ 연산군 묘역아래에서 연산군 묘를 지켜보고 있는 수령 830년 은행나무. 권력의 영욕과 권세의 무상함을 알고 있을까?
ⓒ 이정근
조선 10대 왕 연산.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성종 임금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던 연산군. 아버지 성종의 적자로 등극하였으나 거듭되는 실정으로 권좌에서 퇴출된 임금이다. 그렇다면 연산에게 폭군이라는 딱지는 누가 붙였을까? 그를 권좌에서 밀어낸 반정세력에 의해 규정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 있다. 그를 퇴출시킨 반정세력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연산군일기>는 그의 실정이 부각되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학습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 영화, 연극, 드라마를 접한 우리들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 할 수 있다.

▲ 철조망에 갇혀있던 개방되기 전 묘비석. 지금은 입구 쪽 양지로 나와 있다
ⓒ 이정근
<조선왕조실록>은 그 기록성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기록문화 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 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연결고리에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점이 있었다. 또한 반정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드러냈다.

물론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는 그가 반정군에 의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 반정군 아류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은 패자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 정의공주 묘
ⓒ 이정근
연산군 묘 입구에는 잘 조성된 묘역이 있는데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 묘다. 비공개로 관리되고 있는 묘역 입구에는 거대한 화강석 거북 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용머리를 장식한 비석이 있는데 이는 세종대왕의 부마 안맹담의 신도비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썼다.

출처 : Time Box
글쓴이 : 풍경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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