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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립 선언을 한 사실을 몰랐던 민족지사가 있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2006. 7. 28. 23:12


독립 선언을 한 사실을 몰랐던 민족지사가 있었다?!

민족지사 33인 중 적극적인 독립 선언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는 민족지사 33인 중 독립선언서가 작성되고 제창되는 일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또 독립선언을 제창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일본 당국에 청원하는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의 글을 통하여 민족지사 33인의 한계성을 생각해 보자.

개신교계 인사로 33인에 가담하였던 길선주 목사는 3월 1일 오후 6시경 경성에 도착하였다.

...서명하고도 도주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총독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취조서(取調書)에서 "독립선언을 한 사실은 알지 못하고 민족자결의 세계정세 가운데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을 허락하여 달라는 것을 청원한다 하므로 나도 이름을 낸 일은 있다.

...선언서의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제경찰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함이 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 영향에 대해 생각한 바는 없다고 하면서 "청원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을 내 달라고 의뢰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므로 허락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답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청원'의 입장에서 선언서에 서명을 허락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당시 개신교계 인사들의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자료 출처 : 송호상, "삼일절과 개신교" 중에서, 신앙과 지성-





삼일절'과 개신교

송 호 상

1. 머리말

봄소식과 더불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삼일절'.

마치 매년 찾아오는 절기 마냥 여겨지게 된 3.1운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식은 대개 당일 TV에서 볼 수 있는 '기념식'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무저항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그 결과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해 일제는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하여 진압함에 따라 실패하였던 전민족적 항일투쟁이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특히 3.1운동은 한국 개신교계가 한국 역사의 흐름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까닭에 3.1절 기념예배를 따로 드리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일반인들이나 개신교인들의 3.1운동에 대한 인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이를 기념하는 가운데 진정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념식의 대상에 불과한가, 그도 아니면 그저 공휴일인가. 현실 개신교인들의 신앙 가운데 3.1운동에 참여한 한국개신교인의 신앙이 살아 숨쉬는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념해 왔고, 또 앞으로 기념할 것이라면, 이러한 양태들이 확인되어져야 할 것이다.

2.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에 대하여

3.1절 기념행사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민족대표 33인'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33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개신교계 인사들이 적극 주장한 '독립청원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들이 표방한 '비폭력 무저항' 노선은 타당한 것인가. 이들은 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1918년 여름 국내 개신교계 인사들은 {매일신보}등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및 '민족자결'의 세계정세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당시 상해의 신한청년단은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과 회담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대표단 파견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평북출신 선우혁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선우혁은 이승훈 등 평안도 지역의 개신교계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후 일본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아 국내 개신교계 인사들은 천도교, 불교측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이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던 배경으로서 이른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서 '조선은 일본 영토이기에 적용되지 않으며, 조선문제는 일본의 내정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당시 민족운동가들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민족자결주의의 환상에 기대감을 가지고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해 낙관하면서 독립을 선언, 청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조선민족은 한사람이라도 난폭한 행동을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비폭력 ·무저항'의 운동방식을 강조하였다. 이는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서도 확인된다. '독립선언서'는 일제 통치하의 조선 민족의 이해관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못한 채 외세의존적, 무저항주의적 이념을 제시한 것이었다.

개신교계 인사로 33인에 가담하였던 길선주 목사는 3월 1일 오후 6시경 경성에 도착하였다. 선언서에 서명하였던 인사들이 모두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명하고도 도주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총독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취조서(取調書)에서 "독립선언을 한 사실은 알지 못하고 민족자결의 세계정세 가운데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을 허락하여 달라는 것을 청원한다 하므로 나도 이름을 낸 일은 있다......선언서의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제경찰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함이 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 영향에 대해 생각한 바는 없다고 하면서 "청원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을 내 달라고 의뢰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므로 허락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답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청원'의 입장에서 선언서에 서명을 허락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당시 개신교계 인사들의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3월 1일 거사 당일 '민족대표 33인'(참석자는 29인)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였던 파고다 공원에는 가지 않고 종로에 있던 '태화관'에 모였다. 학생 대표가 찾아와 만세시위를 직접 주도할 것을 청하였으나, 우발적인 폭력시위로의 변화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어 만세삼창과 건배를 한 뒤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고하고 자수하였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지주, 자본가로서의 사회경제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만세운동을 전체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또한 그 내용보다는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선민족의 힘을 결집시켜 독립을 쟁취하기 보다는 열강의 '자비심'과 일본의 '이성'에 호소하여 독립을 청원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은 3.1운동의 개시 및 초기 운동의 확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 의의를 다하였던 것이다.

3. 대구지역 만세운동에 대하여

3.1운동은 청년, 학생, 지역 종교지도자, 유림 등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전개과정에서 일제는 처음부터 헌병, 경찰 등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전개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계급, 계층간 연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지역 단위의 고립 분산성을 극복해가면서 지역간 연대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평화적 시위가 일제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게 되자 민중들은 돌멩이, 몽둥이, 괭이, 낫 등으로 무장하여 일제 지배기구인 면사무소, 경찰관서, 헌병대 등을 파괴하였다.

1919년 3월8일 시작된 대구, 경북지역의 3.1운동은 4월 말까지 110회정도의 시위가 거의 매일 전개되었으며, 참가인원도 약 2만7천여명에 달하였다.

대구지역의 3.1운동은 3월 8일부터 3월 30일까지 3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3월 8일에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은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목사와 계성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이만집 등이 주도하였다. 이만집 목사는 1919년 2월 24일 당시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33인 중 대구경북지역 독립선언서 배포책임자인 이갑성의 방문을 받았다. 이갑성은 서울에서의 3.1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청하였다.

한편에서는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하던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대구에 와서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를 만나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 이만집은 백남채 등 당시 계성학교에 근무하던 김영서, 김태식, 최경학 등과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이만집은 독립은 해야하지만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될 것이며, 또한 일제의 무력탄압에 의한 피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후 3월 3일 이갑성이 다시 이용상과 최재화를 보내어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이만집은 대구지역 3.1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남성정교회 조사로 있던 김태련과 신정교회(현 서문교회) 장로이며 계성학교 교감이었던 김영서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들은 흔쾌히 동의하였다. 아울러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을 참가시키기로 하고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 최경학과 신명학교 교사 이재인과도 협의하였다. 그리고 당시 의성출신으로 교회조사였던 이태학에게 지시하여 대구성경학원의 성경강습회에 참가하고 있던 각지 교계지도자 등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이만집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계획 이외에 대구고보에서도 이미 서울의 운동소식을 접한 허범, 신현욱, 백기만 등이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상화의 집에서 계성학교와의 제휴를 제의받고 이에 동의하였다. 이 일을 계성학교 학생 정원조가 이만집 등에게 전달하였다. 3월 4일에는 김영서와 이재인, 대구고보와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3월 6일 이만집은 김태련 최경학 이재인등과 만나 거사일을 대구 장날인 3월 8일로 합의하였다.

이후 김태련 조사가 3월 7일 밤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그런 가운데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각 지역의 일제경찰들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대구에서도 홍주일(천도교 교구장)과 백남채가 거사전에 일제경찰에 검거되었다.

거사 당일 서문시장에는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천도교계 교남학교 학생과 장날 상인들과 농민 등 1천여명이 모여들었다. 김태련 조사가 쌀가마로 만든 단위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이에 이만집목사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각자 힘차게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그 순간 참여한 학생과 상인, 농민등이 동조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렬을 이루었다. 이들 시위대들은 일본경찰의 저지를 돌과 나무막대기로 맞서 싸우면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문다리(동산파출소 앞)를 지나 만경관을 경유하여 지금의 약전골목에 있는 대남한의원에서 동성로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때 남산동쪽에서 신명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이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지금의 대구백화점 부근)에 다다르자 일제 경찰은 기마대와 무장군인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인근 주민들까지 가세한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경찰은 무차별적인 폭력진압을 시도하였으며, 결국 이만집 목사를 비롯한 157명이 검거되었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김태련 조사의 장남 용해(당시 법원 서기)가 일제경찰의 폭력에 의해 결국 사망하였다.

만세시위 다음날인 3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남성정교회 등 대구시내 교인들은 이만집 목사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재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0일 오후 4시경 덕산정시장(현 동아쇼핑 자리)에서는 약 200여명의 군중들에 의해 지난 토요일 서문시장에서의 만세시위보다 더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후 일제에 의해 대구 시내 각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학생들과 일부 지식인, 종교계 인사들은 자신의 연고지로 돌아가 운동을 확산하였다. 또한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자 비밀결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혜성단은 김수길, 이영옥 등이 조직한 것으로서,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거나 일본 물자 배척, 조선인관리의 사직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불교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윤학조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고향 공산면에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3월 30일 팔공산 동화사 소속 지방 학림 학생 김문옥 등과 덕산정 시장에서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4. '3.1 운동', 그 이후.

3.1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일제하 민족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민족운동의 주체세력으로서 '민중'이 전면에 부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공화주의 이념이 보편화되었다. 이를 통해 1920년대 노동자, 농민층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아울러 '외교독립노선' 등 외세의존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전국적 확산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 각 지역의 개신교 목사와 신도들이었다. 대구지역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계는 일제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전국의 개신교인 3천5백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는 전체 검거된 수의 17.6%에 해당한다. 그리고 교회 88개소와 신자 2만여명의 감소현상이 나타났다.

개신교계에 대해 일제는 위와 같은 탄압과 더불어 선교사와 한국교회,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에 대해 회유, 분열정책을 전개하였다. 총독부는 종교과를 설치하여 개신교계에 대해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한편, 개신교회를 민족운동에서 분리시켜 개량주의적 노선으로 유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회유 분열정책과 관련하여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한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이 등장하였다. 이는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하였던 허무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회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현실도피적 내세신앙이 정착하는 계기였다.

이와 달리 한말 이래 실력양성을 추구한 계몽주의적 성향을 가진 개신교계 지도자들은 3.1운동의 실패가 민족의 독립역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 판단하였다. 그들은 계몽활동을 통해 독립역량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아래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취하였다. 이른바 민족개조론의 입장에서 교육 문화활동을 통해 실력양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유보시킨 상태에서 전개된 탈정치적 성향의 사이비 민족운동론이었다. 민족독립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의도대로 민족운동세력을 분열시키고 친일파의 폭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노선에서 활동했던 이광수, 김활란, 최린등은 이후 모두 철저한 친일 활동가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개신교계의 주류들은 3.1 운동의 민족정신을 계승하지 못한채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이는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대구지역 3.1운동을 주도하였던 개신교계 인사들은 출옥 후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이만집 목사는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에서 시무하는 가운데 미국 선교사들의 교권에 저항하며 '자치교회'를 선언하였다. 1931년 선교사와 노회측과의 법적 투쟁에서 패소한 그는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였다. 일제말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우고 기도생활을 하였다.

이만집 목사와 함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태련 조사는 출옥후 현풍교회를 개척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했던 그는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3년 일본 교토로 건너가 한인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글 교육을 실시하다가 일제에 의해 조선으로 추방되었다.

김태련 조사의 사위가 되는 여규진은 대구지역 3.1운동에 참여하여 검거되었으나 미성년자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는 1922년 여자야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활동을 전개하다 2개월동안 구금되었다. 신간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자 이에 동참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일제 탄압이 강화되자 만주 봉천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대구 만세운동 직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던 백남채는 1920년 7월 출옥후 '조선연와'(朝鮮煉瓦)라는 벽돌공장을 설립하는 등 지역 경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친일교육단체였던 '대구학교평의회에 회원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1936년 남산정 제2구 총대(總代)되어 일제의 말단 지배관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조선사회를 전시체제(戰時體制)로 재편하면서 종교단체도 활용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 결성된 것이 '기독교대구연합회'였으며, 백남채는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출신으로 '민족대표33인' 가운데 가장 오랬동안 생존하였던 인물이 이갑성이다. 그는 해방 이후 항일독립운동활동을 배경으로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자유당 최고위원, 민주공화당 당 총재고문, 광복회 회장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제시기 행적은 해방 이후부터 계속해서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갑성의 원적을 확인한 결과 이와모토 쇼이치(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40년대 상해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였다는 증언들이 제기되었다. 그의 후처였던 최마리 또한 상해에서 미장원을 하면서 상해 거주 조선인 친일조직인 계림회, 일본 관료, 헌병대 장교들과 자주 접촉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일제시기 개신교회와 교인들의 모습 가운데 우리가 기념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3.1절은 어김없이 반복될 것이며, 기념될 것이다. 이 운동이 진정한 전민족적 항일투쟁으로서 기념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개신교계의 역할도 3.1운동에 국한되어 기념되어질 것이 아니라 이후의 친일활동과 신사참배 결의 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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