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이순신의 두 얼굴

거자필반(去者必返) 2005. 10. 6. 22:15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2004년 7월/700쪽/28,000원


▣ 저 자  김태훈

1964년에 태어났다. 역사책을 즐겨읽는 평범한 독자였으나 『난중일기』를 읽은 후 이순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련 사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4년 현재 전국은행연합회에서 일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인간 이순신의 '영움됨'을,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 시도의 결과이다. 이순신의 영웅됨은 '13척의 배만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장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 상황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 평범한 인간에서 비범한 영웅으로 거듭난 점에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


평범한 역사서 독자였던 지은이가 『난중일기』를 시작으로 『선조실록』『장비록』『임진장초』『선조수정실록』『일일기』 등 많은 사료와 씨름하며 7년간의 임진왜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밝혔다. 그 속에서 안으로는 자신과 밖으로는 절망적인 현실과 싸웠던 '인간' 이순신, 그 과정에서 평범에서 비범으로 스스로 나아간 '영웅' 이순신의 삶이 그려진다.


▣ 차 례

머리말 - 오늘을 위한 이순신, 평범에서 비범으로


제1장 7년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

제2장 수군에게 희망이 있었다

제3장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제4장 누구를 위한 휴전협정인가

제5장 조선 최초의 해군참모총장 이순신

제6장 이순신 대 원균, 역사의 이분법

제7장 조선을 두 번 살리는 이순신

제8장 이순신, 그 앞 이야기로

제9장 이순신, 그 뒷 이야기로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2004년 7월/700쪽/28,000원


1. 7년 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1591년인데 다음 해에 ‘7년 전쟁’이 발발했다. ‘7년 전쟁’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아니 집권층이 애써 무시만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집권층은 그 많은 전쟁의 징후를 보고도 애써 무시했다. 1591년은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1590년 일본의 동태를 탐지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등의 일행이 1591년에 비로소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황윤길은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당시 격렬했던 당쟁으로 비추어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에서 김성일의 의견이 힘을 얻었을 것은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통신사가 파견되기 이전에 전쟁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거리로 볼 때 일본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운 쓰시마. 조선과 일본의 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조선산 인삼과 약품 등 양국 교역을 중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쓰시마 도주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1587년 도요토미의 명으로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전쟁 발발 5년 전이니 조선이 통신사를 잘 활용했으면 전쟁 대비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조선은 일본으로 가는 물길이 어두워 사신을 파견할 수 없다는 상식 밖의 이유를 들어 통신사 파견을 거절했다. 우리는 『징비록』에 실린 다치바나의 탄식을 통해 양국이 화평하기를 바라던 쓰시마 도주의 고민을 알 수 있다.


다치바나는 객관으로 돌아와서 탄식하며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다치바나가 돌아가서 보고하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다치바나를 죽이고 또 그 일가를 멸족시켰다.


중국 정복의 꿈을 가진 도요토미가 조선의 한 차례 거절에 그만둘리 만무했다. 이번의 요구는 조선 국왕을 일본에 입조(入朝)시키라고 했다. 쓰시마 도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사위 소 요시토모는 도요토미의 요구와 함께 1589년에 야나가와 초신, 승려 겐소 등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제2차 일본 사신 파견이었다. 그들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는 입 밖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조선의 노여움만 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통신사 파견은 또 이뤄지지 않았다.


잠시 쓰시마로 돌아갔던 그들은 다시 부산포로 건너왔다. 그들의 요구를 접한 조선은 일본 해적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면 응하겠다고 했다. 통신사 파견의 명분도 찾고 그들의 성의도 시험하자는 의도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은 1590년에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조정은 그 말을 그대로 따랐다.


쓰시마 도주는 도요토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명과의 조공 무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과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해 명에 대한 조공 무역을 중재해달라고 조선에 계속 청원했다. 그의 판단에 일리가 있었음은 나중에 증명되었다. ‘7년 전쟁’ 때 명과의 강화 협상에서 도요토미가 요구한 일곱 가지 조건에 명과의 조공 무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쓰시마 도주는 조선통신사가 일본만 건너가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성일이 전쟁불가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완전히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수단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쟁 준비를 알려주어 조선이 대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동원한 모든 전쟁 방지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일은 살아남기 위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붙는 것이었다.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그는 도요토미의 전위대로 돌아섰다.



2. 수군에게 희망이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해질 녘에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출현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아침에 대대적인 부산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에 있던 이순신이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4월 15일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비로소 출동했다. 조선은 이순신이 출동하기 이틀 전인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는 비운에 처했다. 이순신이 출동할 때 선조는 이미 서울을 떠나 북으로 비참한 피란 행차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제2차 출동 기간은 1592년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이다. 제1차 출동 때에는 예기치 않은 선조의 피란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갑자기 귀환하게 되어 기간이 짧았으나 이 제2차 출동은 작심을 하고 떠난 것이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 가운데 “격파한 왜선이 72척이며 왜의 머리가 88급입니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72척의 적함을 격파했다면 어마어마한 전공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의 공격으로 일본 수군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제2차 출동은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의 자세가 180도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1차에서 이순신은 적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동안의 전투를 통해 아군의 막강한 화력과 우수성을 증명해보였다. 육전에서는 연전연패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해전에서는 백전백승할 자신감이 생겼다.


제2차 출동에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와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 그리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 연합 함대를 구성했다. 전라좌수영 23척, 경상우수영 3척, 전라우수영 25척의 대규모 선단이었다. 이억기 함대는 이순신이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 합류했다. 이순신의 부하들은 이억기 함대를 보고 너무도 좋아서 뛰어올랐을 만큼 기쁨에 휩싸였다. 이순신의 보고서이다.


항상 외롭고 약한 군세를 염려한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이 계속된 전투로 피곤하게 될 무렵에 응원군을 맞이하게 되자 좋아서 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2차 출동의 첫 해전인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그 웅장한 모습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었다. 거북선을 만들라고 지시한 이는 이순신이었고 그 지시를 받고 거북선을 제작한 이는 나대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북선의 첫 출동일에 조선군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그 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과 나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부상은 중상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만 믿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 이순신은 그 수술을 하면서 웃고 이야기까지 했으나, 사천해전에서 입은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나중에 많은 고생을 했다.


그날 공도 철환에 맞아 왼편 어깨를 뚫고 등까지 박혀서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지만 공은 그대로 활을 놓지 않고 종일 독려하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철환을 파내었는데 깊이가 두어 치나 되었다. 온 군중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은 웃고 이야기해가며 태연했다.



3.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의 피해는 더 이상 방치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일본 수군의 활동 반경은 일본~부산 그리고 경상도 연해안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의 기본 구상인 수륙병진책을 실현하려면 바다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이에 일본은 수군을 재편성했다. 전라도 바다 공격에는 총 115척의 함선이 배정되었고, 공격 함대는 원활한 공격을 위해 다시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조선 수군의 궤멸을 지시받은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는 6월 7일 서울에서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초대형 함선 7척을 포함한 73척으로 함대의 규모가 가장 컸던 와키사카는 공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단독 출전을 결정했다. 적장 이순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정보를 접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순신의 함대를 궤멸시킨다면 그의 입지는 제1군의 고니시나 제2군의 가토와 같은 반열로 오르는 것도 기대할 수 있었다.


와키사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군사의 사기였다. 적의 함대와 부딪치면 백병전으로 승리를 가르는 일본 수군의 전술상 군사의 사기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선 함선이 크고 육중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 함선이 여러 문의 대포를 쏜다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와키사카에게는 속도가 있었다. 조선 수군이 포를 한 번 쏘고 주춤하는 사이에 쏜살같이 돌진하여 백병전을 구사하면 조선이 자랑하는 포는 무용지물이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와키사카의 기본 구상은 당장 견내량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1592년 7월 8일 고요한 새벽을 틈타 견내량에서 여수로 진격할 구상에 바쁜 그 앞에 느닷없이 이순신의 함대가 나타났다. 지휘 함선에서 부하들과 작전 구상을 벌이던 와키사카는 그 급보에 벌떡 일어섰다. 와키사카의 반응은 재빨랐다. 즉시 전 함대에 공격 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곧이어 조선의 전 함대가 견내량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작전은 속도전이었다. 와키사카는 전 함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의 전 함대가 일제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진격해 들어오던 조선의 선봉함이 주춤하더니 갑자기 선체를 뒤로 돌렸다. 견내량 바다 입구로 돌진하자 그곳에 버티고 있던 조선 함대 본대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와키사카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조선 함대의 섬멸은 속도에 달렸다. 한 척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한산도 앞바다로 도망가던 조선 수군은 오죽이나 급했던지 대열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선 수군과의 접전에 대비해야 하는 국면이었다. 그는 전군에 백병전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 함대에서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망가던 조선 함대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함대가 마치 초승달처럼 넓은 바다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학익진이었다. 그러나 와키사카는 학익진은 구사하는 쪽의 전력이 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 밀어 붙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선 함대의 전투 배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선회를 끝낸 조선 함대에서 강력한 포환이 날아들었다. 와키사카는 버텨야 한다고 판단했다. 와키사카의 일본 함대는 조선의 학 날개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자진하여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포 사격이 격렬하지만 다시 장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일차 포 사격이 끝난 후 조선의 함대가 다시 선회하기 시작했다. 한쪽 포를 쏜 뒤 반대쪽 포를 가동한 것이다. 잠깐 사이 다시 포가 날아왔다.


와키사카의 머리 속에 후퇴라는 절망적인 단어가 스쳤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일본 함선은 가속도가 붙어 선회하기엔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윽고 조총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본 함선의 조총과 조선의 화살이 교차되었다. 격전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그의 정예 수군이 적함에 용감하게 기어올라가 적을 모조리 섬멸할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거북선 두 척이 일본의 선봉 함대의 빠른 속도를 맞받아 칠 기세로 전진해 들어왔다. 거북선은 이미 포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일본 함선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거북선의 충돌로 일본 함선은 갈가리 찢겨졌고 백병전을 준비하던 부하들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거북선의 저지에 선봉선이 다시 그 뒤의 함선과 충돌했고, 일본 함선끼리 차례로 들이받으면서 생기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비규환이었다. 남은 것은 함선을 뒤로 선회하여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한 밀집대형 안에서 게다가 선회 폭이 큰 일본 함선으로선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에 갇힌 토끼를 사냥하듯 조선군은 맹렬히 일본 함선을 격파하고 있었다. 퇴로를 두고 최후의 격돌이 벌어졌다. 요행히 조선 수군의 우익 사이를 빠져나간 함선 몇 척의 모습이 보였다. 한산도로 접근한 함선들에 있던 400여 명의 부하들이 조선 수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함선을 버려둔 채 허겁지겁 근처 숲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패배였다. 이 패전으로 와키사카는 결정적으로 도요토미의 신뢰를 잃었다. 와키사카는 자신의 영광만이 아니라 도요토미의 야망도 일순간에 날려버린 한산해전을 지금도 전하는 그의 『와키사카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가신 와타나베를 비롯하여 많은 이가 전사했다. 대장인 나는 노가 많은 배를 탄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으로 갑옷에 화살을 맞아 위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4. 누구를 위한 휴전협정인가

조명연합군이 여석령과 벽제관 사이의 협곡에서 대패를 한 뒤 파주로 퇴각한 이여송은 그 후유증으로 군대를 다시 개성으로 철군하려 했다. 이여송이 개성까지 철군하면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서울 수복의 포기와 함께 전선의 소강상태를 의미했다. 이여송은 평양성 수복이라는 전공을 세운 상태에서 더 이상의 위험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여송의 개성 철군 움직임에 조선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 번의 패배로 철군하여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사태였다. 하지만 조선의 철군 반대에 대한 명의 대응은 오만 그 자체였다. 원군이 아니라 점령군 같은 태도였다. 그 과정에서 명의 일개 장수가 조선의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명이 7년 전쟁에 참전한 명분은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참전 목적은 자국의 안보 때문이었다. 한편 명의 참전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조선군이 작전권을 상실한 것이다. 제1차 평양성 전투가 패배로 끝나 조승훈의 명군이 자국으로 도주한 상태에서, 심유경이 벌인 휴전 협상에서도 조선은 의견 개진은커녕 통보만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패배하자 조선의 작전권 상실은 더 분명해졌다. 그는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강화 협상에 열중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성룡에게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성룡의 반대 공작으로 강화 사절단이 일본군의 진영에 가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은 이여송이 격분하여 곤장 40대를 치려고 유성룡을 끌고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유성룡이 명의 군사 세 명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던 중 그 보고가 허위로 드러나 다시 유성룡을 풀어준 이 사건은 점령군의 오만과 무례함이 극에 달한 사례였다. 당시 유성룡의 지위는 체찰사, 즉 전시총사령관의 위치였다.



5. 조선 최초의 해군참모총장 이순신

한산도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적과 대치하던 1593년 10월 9일, 이순신은 조정에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를 받았다. 정식명칭은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였다. 3도는 경상, 전라, 충청도를 말한다. 이순신은 보고서에서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뜻밖에도 이번에 3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을 변변치 않은 신에게 내리시니 놀랍고 황송하여 깊은 골에 떨어지는 듯합니다. 신과 같은 용렬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신의 애타고 민망함이 이 때문에 더합니다.


조정이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이순신의 공이 훌륭했다는 것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3도수군통제사는 새로 만든 자리로, 이순신을 위해 만든 자리다. 아무리 공이 커도 새로 직함을 만들어 앉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동안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큼 증폭된 상태였다. 같은 수사로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실제로는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지휘가 생명인 군대에서 그들의 불화는 심각한 전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조정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조정은 한 명을 더 높은 지위에 임명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 불편한 관계도 정리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3도수군통제로 임명 후에도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원균과의 불화 속에서도 이순신은 함선을 건조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숙련된 기술자와 좋은 목재가 필요했고, 그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포였다. 함선은 거의 다 만들어가는데 철이 부족해 함선에 장착할 포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정은 파탄 나서” 성과는 크지 않았다. 철의 자체 조달이 여의치 않자 이순신은 마지막 방법에 호소했다. 조정에 직접 요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정에도 비축된 철이 없음을 아는 이순신은 국가 차원에서 조처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철물의 중량에 따라 직함으로 상과 벼슬길을 주기도 하고, 병역을 면제하기도 하고, 천한 신분을 면하게도 하는 공문을 만들어서 내려보내주시면 쇠를 거두어 총통 등을 만들어 군사상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순신의 요청에 조정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594년 2월 3일 『난중일기』의 “원식이 남해 현령에게 쇠붙이를 바치고 면천(免賤) 공문 한 장을 받아갔다.”는 내용으로 보아 이순신의 요청에 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의 관리 능력은 둔전 설치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둔전 설치는 전쟁으로 떠도는 민초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그 수확의 절반은 경작자인 민초가, 나머지는 군대가 거두자는 방안이었다. 이순신은 둔전 설치를 민초와 그의 군대 모두에게 좋은 상생의 방안으로 보았다.


한편 이순신은 지휘관으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에게 곤장 맞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목을 베인 자도 무수히 많았다. 이순신은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없이 처단했다. 엄격한 군율 적용은 그가 군대를 이끌어가는 기본 강령이었다. 그는 휘하 수령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체적으로 조용히 처리하지 않고 조정에 보고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은 선뜻 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의 기강 확립과 전투력 확보였을 뿐이다. 이를 두고 지휘관으로서 너무 강경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순신은 또한 합리적이었다. 이순신은 공식 대화 창구를 통해 부하 장수들과 대화했고, 지금의 참모부 또는 작전 상황실에 해당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설치해 혼자만의 전횡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6. 이순신 대 원균, 역사의 이분법

이순신과 원균의 문제. 조정은 결국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출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조정은 원균의 장군으로서의 기질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원균은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원균 입장에서 보면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이순신 밑에서 고분고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전쟁 초기의 지원 요청을 이순신이 거절한 것도 가슴에 못이 되고, 나아가 이순신이 끊임없이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것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보고에는 분명 이순신의 악의가 포함되어 과장되거나 거짓으로 꾸며진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자신의 전출 소식을 들은 원균은 어떠한 기분이었을까? 이순신은 또 어떠했을까? 그들의 상반된 처지는 1595년 2월 27일 『난중일기』에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다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균이 받은 충격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이순신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정도 없었다. 이순신은 먼 길을 떠나는 원균을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악연은 이순신의 실각으로 입장이 뒤바뀌게 되었다. 1587년 해가 바뀌면서 고니시의 제1군 1만 4,700명은 일본을 떠나 부산포 근처의 두모포에 무사히 상륙했다. 1월 중순에는 가토의 부대도 서생포에 상륙했다. 대규모의 군대가 가려는 지점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고 여기에 조선 수군의 활약은 전혀 없었다. 그 핵심에는 이순신의 실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왜 그 중요한 시기에 조정은 이순신을 실각시켰을까?


그 단초는 이순신의 부하들이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에 잠입하여 적의 가옥 1,000여호, 화약 창고 2개, 군량미 2만 6,000여 섬, 적선 20여 척 등을 불태웠다는 이른바 ‘부산방화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이순신의 전공 보고서와 이조좌랑 김신국의 보고서가 조정에 동시에 올라온 것이다. 김신국은 이순신의 보고서가 잘못이라는 것을 조정에 알렸다. 부산방화사건은 이원익의 부하들이 한 것이고 이순신의 부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이 두 보고서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자료와 정황으로 볼 때 이순신이 부하들의 말만 믿고 보고서를 제출한 실수였다.


불행히도 조정의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뜻밖에 적장 고니시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지에 파견한 밀사 요시라에서 비롯되었다. 가토와 정적이었던 고니시가 가토의 도해 정보를 조선 조정에 흘림으로써 가토의 제거를 획책하는 정보였다. 선조는 가토의 도해 정보에 대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속이는 일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리면서 이순신에게 가토의 군대가 바다를 건널 때 격퇴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선조의 판단에 조정이 마냥 따른 것은 아니었다. 비변사는 고니시의 간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였다. 그래서 비변사는 공문에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십분 계엄하여 전후로 나누어 지키며 야간에는 더욱 기습을 대비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한산도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두고 조정은 황망해졌다. 선조와 조정이 얼마나 고심어리게 내린 결정이던가! 이 항명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요시라가 말한 대로, 가토가 바다를 건너 조선에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세의 평가는 이순신의 실각이 잘못되었다는 데에 모두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조일전쟁이 발발할 때, 즉 적의 대부대가 조선을 침공해오고 있는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때 이순신은 막강한 수군을 보유하고도 바다를 건너 속속 육지에 도착하는 강력한 적의 육군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조정과 이순신의 판단,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이순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군을 바다에서 요격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위험에 노출되지 않은 채 차후를 대비하여 수군을 보존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조정의 노여움과 그의 실각이었다.



7. 조선을 두 번 살리는 이순신

이순신이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칠천량 대패의 비보를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1597년 7월 18일 새벽이었다. 이순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조선 함대의 궤멸이었다. 원균의 대패에 가장 난감해할 사람은 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며 출동을 지시한 도원수 권율이었다. 권율은 사태의 해결을 위해 진중 회의를 거듭했지만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판옥선도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밖에 없었다. 수군의 궤멸은 적의 전면전을 의미하였고 그 1차 대상은 전라도였다. 권율은 답답한 마음에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찾아갔다. 이순신이 권율에게 제안한 것은 자신이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었다. 7월 23일 이순신은 실사 결과 보고서를 권율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선조는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면서 그답지 않은 솔직한 자세를 보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고 나아가 칠천량해전의 패배에 대해 자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세계 해전 사상 유례가 없는 대전투가 다가서고 있었다. 칠천량해전에서 도주한 배설의 함선 12척과 함선 1척을 합쳐 단 13척의 함선으로 130여 척의 적함을 상대해야 하는 명량해전이었다. 이순신의 불리함은 단지 함선 수의 열세만이 아니었다. 대규모 적 선단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병사 개개인에게 전염되는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그 공포는 군대를 좀 먹어갔다. 서열 2위의 장군이었던 수사 배설은 결국 죽음의 공포에 항복했다. 도망쳐버린 것이다. 이순신이 장군의 탈영 사태까지 겪으면서 외롭게 분투하는 것과 반대로 일본 수군은 열기에 차 있었다.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어진을 거쳐 어란포로 진을 옮겼다. 며칠 뒤 적의 수색선이 나타나자 다시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시 이순신이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한 것은 1597년 8월 29일이었다. 서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명량의 좁은 해협을 등지고 있는 벽파진. 적이 이곳을 뚫으면 바로 서해였다. 이순신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여기가 뚫리면 일본 수군은 한강으로 이어지고 그쯤 되면 조선 수군은 더 이상 머물 수 있을 곳도 없어진다.


9월 16일의 날이 밝았다. 날씨는 한없이 맑았다. 적의 동태를 감시하던 정찰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라우수영을 울렸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적선이 우리 함선을 향해 옵니다.” 이순신은 전 함대에 출항을 지시했다. 전 함대라고 해도 달랑 13척의 함선이었다. 곧이어 명량의 좁은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적함이 보였다.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이 지휘하는 130여 척의 대함대였다. 울리는 파도 소리는 죽음이 다가서는 소리 같았지만, 결코 물러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적의 함대는 명량의 폭이 좁아 한꺼번에 달려들 수 없었다. 제1선단을 필두로 하여 제2선단, 제3선단의 순서로 차례로 명량해협에 들어왔다. 조수의 흐름도 조선 수군 쪽으로 역류해 더 불리했다. 적극적으로 노를 저어야 조류를 거슬러 제자리를 지키거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적의 기세에 압도당한 조선 수군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명량의 거친 파도에 맞서 이순신은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섰다. 이순신의 함선이 휘하 부하의 함선을 뒤로하고 불쑥 앞으로 나왔다. 공격 지시에 따라 일시에 지자포를 쏘고 현자포도 가세하자 바다가 화염에 싸였다. 이순신은 외로웠다. 이 많은 적선의 숲에서 자신이 탄 함선만이 외로이 분투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돌아보니 조선의 12척 함선은 먼바다에서 이순신의 독전을 관망하고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면서 화가 치솟았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호령하는 깃발을 올리고 또 초요기도 올렸다. 곧이어 이순신의 일갈이 쩌렁쩌렁 울렸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는 황급히 적선의 숲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뒤의 김응함에게도 이순신은 호통을 쳤다.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사형할 것이지만 적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도록 하라!” 이순신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놀란 김응함은 바로 적진으로 돌진했다.


일본의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그 휘하의 함선 3척을 지휘하여 안위의 함선에 접근하였다. 그는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죽은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이었다. 이순신에게 형을 잃고 그로서는 이 해전이 멋진 설욕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곧장 안위의 함선으로 폭풍처럼 진격해 들어가고 이에 뒤로 쳐졌던 조선 수군이 가세하면서 명량 해협에는 적의 시체가 늘어났다.

이때 이순신의 함선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일본군 출신 준사가 결정적인 사실을 알렸다. “저 무늬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입니다.” 갈고리를 던져 시체를 함선 위로 낚아 올렸다. 이순신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시체를 토막 내게 해 돛대에 걸어버렸다. 선봉 대장의 시체가 토막난 채 이순신의 함선에 걸려있는 모습을 본 일본 진영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일시에 북을 울렸다. 함성도 있는 힘을 다해 질렀다. 하늘까지 사기가 치솟았다. 이제 움츠렸던 모든 함선이 가지런히 도열하여 전 함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31척의 일본 함선이 명량의 파도에 수장되었다. 격전 속에서 쌍방의 함선이 내뿜는 화염이 점차 짙어졌다. 좁은 명량 해협은 그 연기로 뿌옇게 뒤덮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투 장면을 가려버렸다. 포성이 멈추고 뿌연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의 실체가 드러났다. 명량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해협을 가득 메웠던 일본 함선은 간 곳이 없었다!


명량해협의 끄트머리에는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려고 급히 노를 젓는 일본 함대의 모습만 보였다. 조선 수군은 한 척이라도 더 격침시키려고 추격전을 벌였다. 승리였다! 기적이었다!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이순신 최후의 결전, 바로 노량해전이다. 잘못을 저지른 부하에게 가차없이 처벌을 내리는 이순신이었다. 그러한 이순신이 침략자에게 추호의 연민과 동정이 있을 리 없었다. 이순신은 조선을 빠져나가려는 침략자에게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요구했다. 도망가는 적을 향한 비정한 일격, 그래서 더 치열하고 안타까운 전투였다.


1598년 11월 18일, 밤바다를 가르며 노량으로 출동하는 이순신의 가슴에는 황량한 겨울바람보다 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60여 척의 판옥선 규모로, 명나라 진린의 수군은 200~300척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칠천량 때의 규모를 넘어선 것이었다. 일본의 함대도 대규모였다. 교착 상태에 빠진 고니시의 군대를 철군시키려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조명연합수군을 섬멸해야 했으므로 그에 걸맞은 규모, 약 500여 척의 대규모 함대가 동원되었다.


11월 19일, 노량의 바다는 찼다. 새벽 2시 아득히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노젓는 소리였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이순신의 함대가 선봉의 적함을 겨냥했다. 불화살의 시위가 당겨졌다. 어둠이 사라진 노량 바다, 적의 가공할 규모가 드러났다. 노량의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일제히 포성이 울렸다. 노량의 파도 소리가 일순간에 가라앉고 장중한 포성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느닷없는 포환에 당황하던 일본 함대도 응사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처음부터 근접전으로 전개되었다. 노량의 좁은 해협을 두고 날카롭고 숨막히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일본 함대는 산처럼 그어놓은 저지선을 타고 넘어야 고니시를 구원할 수 있었다. 수적 우위를 내세워 연이은 돌파를 감행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포환과 불화살에 신음을 통하는 함선과 병사들뿐이었다.


파도를 등에 업고 바람처럼 밀려드는 조선 함대의 맹공에 일본 함대는 전열이 흐트러졌다. 일본의 지휘부는 이순신의 함대가 내뿜는 엄청난 화력에 압도되었다. 더 이상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으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정보가 입수되었다. 선봉 함선에서 왼쪽 바닷길이 열려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탈출구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범한 노량해전 최대의 실수였다. 일본 함대 앞에 펼쳐진 것은 앞이 가로막힌 포구였다. 경악할 일이었다.


도망갈 물길이 막힌 것을 알아차린 적은 발악했다. 자포자기에 함선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병력이 함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정면대결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길은 포위망을 뚫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적군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격전 중에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적탄에 맞아 사망했다. 낙안 군수 박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의 조선 장군도 적탄에 맞아 그 운명을 다하였다. 포위망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도주하던 적함을 쫓던 송희립이 예기치 않은 총격에 총상을 입고 판옥선 위에 무너졌다. 비보를 들은 이순신은 전군에 더욱 분발하라는 북소리를 울렸다. 그때 달아나던 적이 쏜 탄알이 이순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부하들이 급히 이순신을 부축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총상을 입어 기절했던 송희립은 마지막 투혼을 발휘해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이순신은 마지막 벅찬 숨을 쉬고 있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노량해전은 일본군의 대패로 막을 내렸다. 이덕형이 선조에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함선 200여 척 격침에 사망자가 수천 명이라고 했다. 가히 7년전쟁 최대의 전공이다. 이 최대의 전공을 올리기 위해 최대의 혈전을 벌인 전투가 바로 노량해전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순신의 삶은 우리에게 ‘물러서지 않음’이라는 화두를 선사한다. 이순신은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내부의 적에게도 물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신은 죽음에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물러서지 않음’의 절정은 전투였고 그 전투를 통해 한반도를 살렸다. 그래서 냉철했을 사관도 『선조실록』에 이순신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를 위해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1596년과 1597년 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한산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8. 오늘을 위한 이순신, 평범에서 비범으로

32세의 늦은 나이에 무관을 걷기 시작한 이순신. 그는 중요한 시기마다 항상 시련을 맞곤 했다. 훈련원에서 근무할 때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부함으로써 후에 군기경차관(왕의 특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실무를 조사해 보고하는 특사)으로 파견된 서익의 보고서로 파면을 당했고, 발포 만호였을 때는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의 눈 밖에 나서 근무 성적을 최하위로 받을 뻔한 사건도 발생했다. 조산호 만호가 되어 북방의 여진족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여진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어 백의종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길을 우직할 정도로 묵묵히 걸었던 그 포기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이 그를 엄습했지만 그는 우회하지 않고 항상 정면 돌파로 일관했다. 나는 이순신의 ‘적’들을 눈여겨 보았다. 이순신은 안으로는 자신과, 밖으로는 무능한 조정과,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한 싸움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 이와 연관되어 집안이 몰살당한 전라도사 김대중의 가택 수사에서 이순신의 편지가 발견되었을 때, 가택 수사를 한 관리는 이순신의 처벌을 우려해 편지를 없앨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공적인 수색 문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사사로이 없애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대로 가져가게 했다. 이순신은 모든 일을 이렇게 정면 돌파했던 강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 하늘이 내린 영웅이 아니었다. 그도 우리처럼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시련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인의 강골로 일관된 길을 걸었다. 그는 진정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갔고, 스스로를 단련시킨 진정한 영웅이 었다. 시련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인의 올바른 강골로 일관한 그의 삶은 이순신을 역사에 등장시켰고, 그 저력은 조일전쟁의 탁류를 치고 나간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 복음과 삶 |글쓴이 : 코람데오 [원문보기]